400년 동안의 침묵
400년 동안의 침묵
구약의 철마(鐵馬)가 말라기에서 멈췄다.
달리고 싶은 갈망이
성난 증기가 되어 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끊겨버린 철로(鐵路) 앞에서
철마는 무용했다.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는
얼음 상태는 오래 지속되었다.
400년 동안의 침묵이었다.
그러나 지체될지언정
꺾일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고요한 침묵은 고요할 수만도 없었다.
그것은 겨울나무 마냥 겉으로는 조용한 듯 보이나,
매 순간 거대한 생명 에너지가 속으로
더해지고 곱해지는 격렬한 종류였다.
이윽고 역사의 시침이 정한 때를 가리키자
오랜 침묵도 깰 준비를 마쳤다.
만사의 시즌을 따라 철마는
지난한 겨울잠에서 깨어나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상을 흠씬 달릴 요량으로 워밍업을 했다.
철로는 그 보다 먼저 일어났는데,
봄 만난 나무의 새싹이 팝콘처럼 쏟아져 나오듯이
천천히 그러나 늦는 법 없이
영원을 향해 울컥 손을 뻗기 시작했다.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라!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매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막1:4,7-8)
이사야의 예언은
수많은 인물들의 시중을 통해 성취되는 중이었다.
그 중 하나가 세례 요한이었다.
하나님의 로고스(말씀), 곧 ‘예수’가
역사에 스포트라이트를 때 까지
그는 근면한 충성을 다했다.
레드 카펫을 깔고(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고),
팡파르를 울리며(주의 길을 예비하라)
로고스의 등장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윽고 평범하나 비범하기 짝이 없는 날은 도착했다.
그 날도 요한은 여느 날과 똑같이
회개의 메시지와 세례로 왕의 대로(大路),
곧 그리스도가 지르밟을 길을 닦고 있었다.
별다른 것이 있었다면 나사렛 출신의 한 청년이
그들 무리에 끼여 있었다는 것.
요한의 세례가 그에게도 주어졌음은 물론이다.
요단 강물에 흠뻑 젖은
청년의 발이 육지에 착지했을 때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이 쪼개졌고,
그 사이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에게로 내려왔다(막1:10).
400년 동안 지속되었던 무거운 침묵이
깨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막 1:11)
지극히 거룩하고도 몹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친밀한 일체가
역사 안에서 최초로 현현되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땅 광야,
곧 요한의 세례 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총천연색 시청각으로 형상화 되셨다.
이 와중에 삼위일체의 역사적 데뷔 무대가
광야인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일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맞이했던 곳도 말구유였으니까.
언제나 이 모양이다.
역사를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
환대가 아니라 박대를 당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라는 조건 속에서
무참한 대우를 받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사랑이 오래 참음인 까닭이다.
참고, 참고 또 참는 하나님의 아픈 사랑으로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이다.
400년 동안의 침묵 속에는
심히 무거워 발화될 수 없던
언어와 고뇌와 기다림이 들어있었다.
아버지와 독생자와 성령의 깊은 대화,
독생자가 짊어져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십자가에 대한 고뇌,
그리고 마침내 역사를 뚫고 들어갈
구체적인 때를 기다림.
철마가 달려야 할 철로는
단 한 번도 분리된 적 없었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분리라는 격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길이었다.
그 지옥을 기꺼이 걸어 들어가겠다는 독생자의 순종에
성부도 울고, 성령도 통곡했을 터이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고,
그래서 기어이 독생자가 이 세상에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나사렛 슬럼 출신에 사생아 예수.
이것은 역사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붙여준 이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고,
손수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 하나님은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 고집(?)했던 침묵을 깨뜨리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 날 성자를 적신 것은 요단 강물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성령의 사랑, 곧 완전히 새로운 이름이
그의 온 몸과 마음과 영혼 전부를 흠뻑 적셨다.
그리고 그 날의 사랑은 근면히 등속운동을 하여
오늘 나에게도 도착했다.
대한민국의 변두리 출신이자 보잘 것 없는 여성인 내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지으신 이름이 배달된 것이다.
“상예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천국의 상속자)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철마를 타고 도착한 곳은 우크라이나.
이곳에서도 철마는 쉬지 않고 달린다.
리비우, 하리코브, 오데사 할 것 없이
그것은 말씀과 함께, 말씀으로 달리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답게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
아버지의 지엄한 뜻 안에서
아들의 가르침을 따라 성령과 함께
400년 침묵의 무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아버지의 영광을 고대하는 중이다.
#Jan. 11. 2019. 사진&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