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창고지기들 2018. 11. 30. 17:55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읽고.



이는 적금의 만기 금액과 다르지 않다. 

2년 동안 여성 주간지에 꼬박꼬박 기고한 서간문을 

한데 묶어 출판했던 것이다. 

‘유동하는 현대’라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 바우만이 

현대의 여성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니 

궁금할 이유는 충분했다. 

나 역시 유동하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 중 하나인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남의 적금 만기 금액을 

꽤 오래도록 가방에 넣고 다녔다.


바우만은 근대를 물질인 고체에 비유한다. 

그것의 확실성이 합리적인 사유와 명백한 구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근대를 담아내기에 

썩 적합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반면, 현대는 액체에 비유한다. 

근대의 합리적인 사유에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붙이고, 

명백한 구조 이면의 부조리함을 자각함으로 

시작된 현대는 불확실성의 시대이며, 

그것의 고삐를 잡고 전면에 나선 것은 소비주의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근대의 모토는 

<나는 보여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바뀐 지 오래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무엇이길 원하는지 

또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길 원하는 지를 나타내주는 

기호로 어떤 물건들을 구입한다. 

우리가 구입한 물건들은 단단한 고체처럼 

견고하게 우리들의 정체성과 뒤엉킨다. 

이제는 우리가 산 물건들이 

바로 우리 자신들인 셈이다. 

-본서 중에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바닷물처럼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파도에 휩쓸려 떠밀려간다. 

오랜 시간을 들인 노력으로 

무언가를 구축하고 성취함으로써 

얻게 되는 즐거움을 박탈당한 현대인들은 

쓰고 버리는 인스턴트 만족 문화, 

많은 양의 즐거움을 위해 

즐거움의 질을 희생시키는 문화, 

인간 존재를 인격이 아닌 

상품으로 사고 파는 문화에 떠밀려 

카드를 긁듯이 먼저 쾌락을 즐기고 

나중에 그것을 갚느라 비참해지기 일쑤다. 


이 와중에 현대인들은 

마치 자신이 유명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스스로 노출하여 

인간관계의 친밀함 마저 잃어버린다. 

친밀함이란 것은 원래 비밀을 먹고 자라는 종인데, 

현대인들은 자기 비밀을 만천하에 공개함으로써 

친밀함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관계의 질인 친밀함 대신에 

자신을 근사한 상품으로 포장하여 

잠깐이라도 수적으로 열렬한 각광을 받으려 하는 

현대인의 욕망을 잘 보여준다.


7년차 선교사인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현대 사회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다. 

소비주의 그물망으로부터 배제된 채, 

변두리 이방 땅에서 

오랜 시간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가치와 즐거움을 위해 

생명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바우만의 안경을 잠시 빌려 쓰고, 

지난 케냐에서의 시절을 돌이켜 본다. 

그토록 끈질기게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명백하다. 

자신을 근사한 상품으로 팔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어서 괴로웠던 것이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 

상품 가치가 전혀 없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바로 나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그것이 새삼 즐겁고 감사하기만 하다. 

물론, 소비사회에서 쓸데없는 인간이 된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기까지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소비의 그물망에서 쫓겨나고 버려지기 위해서 

대가(고통스런 견딤)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저자 바우만은 ‘유동하는 현대’라는 말처럼 

흥미로운 여러 말들을 내게 소개해 주었다. 

예를 들면, 공위시대(한 국왕이 사망하고 나서 

후계자가 즉위하게 되기까지의 시간적인 간격), 

아욱토르(auctor;작가와 배우를 모두 하는 사람),

 믹소포비아(Mixophobia; 뒤섞임에 대한 공포증)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렇게 나는 바우만이 가르쳐준 말들로 

한동안 나를 비추어보았다. 


개인적으로 선교 사역과 관련해서 

나는 일종의 공위시대를 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상을 통해 아욱토르, 

곧 내 존재와 인생을 예술 작품으로 공연하는 자로 

분발하는 중이다. 

또한 나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근면하게 믹소포비아를 일으키는 존재다. 

가만히 심지어 공손하게 처신해도 

그저 존재만으로 불쾌함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은 

절대로 녹록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기어이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축복이기 때문이다. 

낯선 자에 대한 공포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이방인인 나를 포용하고 받아들일 때, 

그들은 나를 배제하기 위해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대신에 활짝 해방되어 

다채로운 주의 축복을 

마음껏 향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 바우만은 

유동하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에게 제안한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철학자답게 그는 

정신없이 휩쓸려 떠밀려가지 말라고 조언한다. 

즉,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고독이라는 숭고한 조건을 박탈하지 말고, 

스스로를 반성하여 수용할 것과 반항할 것을 구별하여 

그에 맞게 상대하라고 촉구한다. 

나아가 한계에 대한 인정과 동시에 

한계를 극복하려는 투지를 겸비하라고 충고한다. 

이와 같은 제안은 그 옛날의 현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의 덕>이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ㅋ


저자가 지나가듯 인용한 카뮈의 말은 

어쩐 일인지 마음에 오래 남는다. 

일상을 제대로 보았던(낯설게 보았던) 

아욱토르의 선포여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흐음. 


아름다움도 있지만 

분명 굴욕적인 것들도 있다. 

나는 그 사명이 어떤 어려움을 안겨준다 할지라도, 

결코 그처럼 굴욕적인 것들이든 

아름다움이든 간에 

둘 중 그 어느 하나에도 

불성실하고 싶지는 않다.






#Nov. 30. 2018.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