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지기들 2018. 10. 18. 15:02







우리 사이



-네 아빠는 아들 바보야.


석식 후, 배를 맛보면서 하진군에게 말했다. 


-엄마 아들이 바보라는 거야?


아삭한 식감과 흐뭇한 단맛이 목구멍에 걸렸다. 

아차차, 한국말이 서툴러 

띄엄띄엄 듣는 하진군이었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부모를 가리켜 

 아들 바보라고 하는 거야. 


그날 아침, 하진군은 

우크라이나 역사책을 깜박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마침 

우크라이나 역사 퀴즈가 있었다. 

애간장이 탈 만한 편은 하진군이었으나, 

정작 새까맣게 타들어 간 쪽은 그의 아버지였다. 

그 길로 아들 바보님은 

학교로 냉큼 달려갔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내게 알려졌다. 

회의 차 아침 일찍 서둘러 외출하고 

돌아온 남편이 이실직고했던 것이다. 

미리 말 못한 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만일 내가 진작 알았다면, 

깜박한 물건이 하진군에게 배달되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그럼, 엄마는 아들 바보 아니야?

-물론 엄마도 아들 바보긴 하지. 

아빠는 책을 가져다주는 아들 바보고, 

엄마는 가져다주지 않는 아들 바보고.


알쏭달쏭한 표정 사이로 행복감이 배시시 피어났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얼굴에 꽃을 피웠다. 

꽃다운 아이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아버지는 잔뜩 시든 들풀처럼 보였다. 

학교에서 만난 아들이 무뚝뚝하고 차가웠다나? 

그것 때문에 서운했다고 한차례 하소연했던 그였다. 

역시나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상처를 받는 법이다.ㅋ


학교는 하진군의 공적인 영역, 곧 사회생활의 장이다. 

그곳에서 그의 정체성은 아들이 아니라 학생이다. 

공적인 장소에서 사적으로 친밀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관계와 장소의 불화가 

긴장과 혼란을 유발하는 탓이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조차 상냥한 자녀이길 

기대하는 것은 부모의 오산이다. 

예의와 격식을 갖추어 

그를 학생으로서 존중해주면 그만이다.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시 86:1)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시 88:6-7)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노래(기도) 묶음이다. 

시편의 시인들은 하나님과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관계를 맺었다. 

개인적으로 그들은 사적인 언어로 

하나님께 하소연을 했고, 

공적으로는 격식에 맞는 언어로 

그분을 찬양하며 예배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사적이든 공적이든 

그 어떤 것도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둘 중 어느 쪽으로도 

편중되어서도 아니 된다. 

시편의 구성이 개인의 노래와 공동체의 노래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인들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을 다양하게 계시하셨다. 

창조자, 구원자, 왕 중의 왕, 재판장, 아버지, 신랑, 

목자, 포도나무, 돕는 자, 친구, 카운슬러, 

주인, 의사, 위로 자, 격려 자 ……. 

이와 같은 비유들은 짝패를 가진 

관계의 호칭들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짝꿍이 된 사람은 

피조물, 죄인, 백성, 피고인, 자녀, 신부, 양, 

가지, 호소 자, 친구, 내담자, 종, 병자, 

고통 받는 자, 낙심한 자 등이 된다. 

이것은 온전한 인격적인 관계란 

상대와 다채롭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임을 가르쳐준다.


상대를 하나의 역할로 고정시키고, 

단 하나의 방식으로만 관계를 맺는 것은 

일종의 패티시다. 

커다란 전체를 작은 부분으로 축소시킨 뒤, 

그것이 전부인 양 집착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 

그것은 일종의 우상화다. 

우상은 전문화된 신들

(다산의 신, 재물의 신, 무병장수의 신 등)로, 

눈과 손에 잡힐 만큼 다운사이징 된 산물이다. 

적당하게 구워삶으면 

자신의 뜻대로 부릴 수 있다고 여긴 나머지, 

우상에 빠진 사람은 그것의 마음을 얻기 위해 

헌신한다. 

그러다가 정작 구워삶아지는 쪽은 

우상이 아니라 본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의사로 고정시키는 사람은 

아플 때가 아니면 그분을 찾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인이기만 한 사람은 

명령 수행하는 일 이외에는 

그분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 

자녀이기만 고집하는 사람은 

그분과 우정을 나누지 못하고,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만 집요하게 구하는 

고집스럽고 우매한 양은 

늦여름의 타는 더위를 버틴 뒤에 맺히는 

포도의 단맛을 알 수가 없다. 

상처받은 내담자로서만 그분을 찾는 사람은 

그분에게도 상처와 고통이 있다는 것과 

그분도 자신의 아픔을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만 목숨 거는 사람은 

원수(죄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옳지 못하다고 비난하다가 

끝내 갈라서기도 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시95:1-3)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시 99:1-3)  


망측하게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염증을 느낄 때가 더러 있다. 

사사로운 것으로 마음이 상하고, 섭섭해지고, 

그래서 서운하여 거리를 두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이런 염증을 어디 나만 느끼겠는가? 

그분도 똑같으실 것이다.) 

그럴 때에도 나는 그분을 

공식적으로 만나는 장소로 꾸역꾸역 나아간다. 

그곳에서 그분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일을 고집한다. 

사적인 관계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까닭이다. 

나의 주님은 공동체 전체, 

국가와 세계 전체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피조물이자 백성으로서 성도들과 함께 

그분을 예배하면서 공적으로 그분과 관계를 맺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살아 숨 쉬는 관계를 맺는 일은 

나무를 기르는 일과 같다. 

오랜 시간이 걸릴뿐더러, 꽃피우고 열매 맺기 위해서는 

한곳에서의 지속적인 뿌리 내림과 

버텨냄의 투쟁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인격적인 관계는 지속적인 관계로서 

공과 사를 아우르며, 

규칙뿐만 아니라 역전, 반전, 변칙 등을 허용하며, 

계획과 즉흥을 모두 수용하고, 

강점과 약점을 공히 귀중히 여기는 동시에 

한없이 환대하다가도 격렬하게 내치기도 하는 

다채로운 것이다. 

특별히 나무를 키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햇살과 물과 바람과 적당한 기온이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의 능력 밖에서 온다. 

즉, 은혜 없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관계는 세상에 없는 것이다. 

결국, 관계는 신비의 일이다.


요사이 부쩍 눈물이 많아진

(갱년기 증상인가?) 남편이다. 

대쪽 같기만 한 이면에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심성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눈물을 찍어대는 새색시 같은 그에게 

나는 듬직한 남편(!)이 되어준다. 

때론 눈물을 놀리면서 웃어대기도 하고, 

어느 땐 말없이 티슈를 건네주기도 하고, 

또 다른 땐 같이 눈물을 훔치기도 하면서. 


그렇게 우리 사이는 깊어져 간다. 

우리 중의 우리이신 

그분의 은혜 안에서.




#Oct. 17. 2018.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