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이집트 피버(Egypt Fever)

창고지기들 2018. 6. 27. 18:21






이집트 피버(Egypt Fever)




#1. 모세의 피버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행 7:22-23)


본토가 뒤바뀐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초에 그것은 아브라함의 것인 팔레스타인이었지만, 

수백 년의 파랑(波浪) 끝에 결국 이집트(애굽)에 정박했다. 

모세는 이집트를 자신의 본토, 곧 자기 백성들을 위해 

사역해야할 곳으로 찰떡 같이 믿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로 몇 차례 더 바뀔 본토였다. 

하지만 모세가 아닌 그 누구라도 그것을 알 길은 없었다.


입양된 왕자 모세는 이집트인들의 모든 지혜를 배웠다. 

나이 사십이 되었을 때, 

그는 일종의 박사학위를 손에 넣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말과 일에 

모두 능한 엘리트가 되었던 것이다. 

그 무렵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자기 백성을 섬기기로 작정했다. 


청년 모세의 꿈은 퍽 야무졌다. 

먼저, 본토 이집트에서 노예로 피폐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훌륭하게 교육시킨다. 

그 후, 순차적으로 자기 백성들로 사회 각층의 요직을 

차지하게 하여 사회적인 이미지를 세탁한다. 

다음으로 여론을 움직여 이집트 시민권을 얻는다. 

마지막으로 자기 백성의 하나님 여호와를 

이집트의 수많은 신들 중 하나로 격상시켜 

합법적이고도 성대한 제사를 드린다.


그럴싸해 보일지는 몰라도 

모세의 꿈은 병자의 망상일 뿐이었다. 

사실, 모세는 지독한 열병에 걸려 있었다. 

급히 치료하지 않으면 주변을 모조리 전염시켜 버리는 

치명적인 이집트 피버에 감염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집트의 세련된 문화와 신학 안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그것을 소비하길 갈망하다가 얻은 병이었다.


다행히도 모세의 들끓던 열망은 

파도의 포말처럼 시원하게 사라져버렸다. 

끓어오르던 피를 주체하지 못하던 어느 날, 

자기 백성을 학대하던 이집트인을 살해했던 것이다. 

그 길로 그는 광야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이 사건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이집트에서 광야로 격리시킨 것이었다. 

기필코 그를 고치고야 말겠다는 여호와의 의지가 

노골적으로 엿보인다. 


광야에서 모세가 잡은 일거리는 양치기였다. 

양치기에게 이집트에서 배운 학문은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 시답잖은 농담보다도 쓸모가 없었다. 

최고의 신학과 철학, 최첨단의 과학과 수학, 

최고급 언어와 문화가 한데 잠을 자며 

양을 돌보는 이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렇게 모세는 꼬박 사십년 동안 갈고 닦은 이집트의 학문을 

제대로 써먹어보지도 못한 채, 이후 사십년에 걸쳐 

야금야금 모조리 까먹고 말았다. 

그의 여호와께서 열꽃처럼 피어난 

그의 흉한 꿈을 무례하지 않게 끝장내셨던 것이다.


이윽고 모세의 머리가 텅 비어버린 어느 날, 

마침내 여호와께서 그를 부르셨다. 

본질적으로 이집트의 신들과는 전혀 다른 분, 

이집트의 신학으로는 도무지 담아 낼 수 없는 

유일하신 타자께서 모세를 부르셨다. 

그것은 모세 자신의 백성이 아닌 

여호와의 백성을 돌보는 사역으로의 부르심이었다. 










#. 이스라엘의 피버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행 7:39-40)


광야의 자유인. 

그것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새로운 정체성이었다. 

이집트에서 그들은 노예였다. 

이집트의 강압 아래서 힘에 부치는 노역으로 

죽지 못해 살아왔던 것이다. 

어느 날 장자들의 죽음으로 이집트 전역이 

초상집이 되었을 때, 그들은 급히 탈출했다. 

대부분의 세간살이들을 버려둔 채, 

꼭 가져가야 할 것만 소략히 챙겨서 급히 떠나야 했다. 

그런 정신없는 와중에도 

미쳐 버려두고 오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이집트 피버였다. 


잠복해 있던 이집트 피버의 증상이 나타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광야를 배경으로 불안정해서 

더욱 자유로운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이스라엘은 불평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지속적으로 끓어오르던 열병은 

마침내 그들로 제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비록 노예였어도 손에 잡히는 

확실한 포지션과 일거리가 있었으며, 

생활 여건이 안정적이었던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다는 

헛소리를 쏟아냈던 것이다. 

그것은 전부(이름)를 걸어 자유를 얻어준 

여호와를 헌신짝 취급하며 모욕하는 처사였다. 


그러나 물러설 리 없는 여호와였다. 

이스라엘의 온갖 불평에도 

그들을 이집트로 돌려보내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모세와 같은 방법으로 열병 치료에 나섰다. 

이집트에서의 기억을 윤색하는 일 없이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꼬박 사십 년 동안 

정처 없이 광야를 떠돌게 했다. 

이집트 피버는 오로지 광야에서만 

나을 수 있는 병이었던 것이다.










#3. 나의 피버



이른 아침, 나는 사도행전 7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막 스데반이 설교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이 일종의 최후통첩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나였다. 

수려한 설교임에도 비장미가 느껴졌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데반은 역사를 텍스트로 삼아 

이스라엘의 이집트 피버 연대기를 짚어주었다. 

나아가 현재 유대 종교지도자들 역시 

이집트 피버에 감염되어 있다고 대담하게 선고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광야보다는 예루살렘, 성전보다는 로마의 왕궁, 

은밀한 지성소보다는 각광받는 공의회, 

고요한 경건보다는 떠들썩한 인기를 

격렬하게 열망하는 이집트 피버. 

득 끓어오르는 열기가 느껴졌다. 

목 뒷덜미에는 이미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어보았다. 


‘갱년기 증상인가? 

아니면 … 아뿔싸! 

이집트 피버는 유대인들의 전유물이 아니었구나!’



수십 년 동안 본토 이집트에서 배운 지식들을 

이집트에 살고 있는 그분의 백성을 위해 

마음껏 사용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반짝거리는 물비늘로 가득한 주류(主流)의 한복판에 

튼실한 어선 하나를 띄워 물고기를 잡고 싶었다. 

그렇게 그분의 나라에 기여하면서 

썩 안정적이고 편안한 자리를 잡고 싶었다. 

그러나 은혜의 습격으로 모든 갈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분명 많은 이문을 남길 영리한 계획서였으나 

오너(Owner)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오너는 이집트가 아닌 광야로 발령을 냈다. 

그곳이 아니면 이집트 피버를 치료할 수 없었던 것이다.


키예프의 6월은 찬란하다. 

가끔씩 내리는 소나기는 

그것을 더욱 반짝이게 만드는 중이다. 

이곳이 광야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이집트의 모든 지혜가 이곳에서는 무용하며, 

이집트에서 능했던 말과 일들 또한 

이곳에서는 아무런 경력이 되지 못한다. 

그 와중에 나는 가끔씩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어서 

몸살을 앓기도 하고, 이집트에 대한 그리움으로 

금송아지에 슬쩍 손을 대고 싶어 하기도 한다.


이집트 피버는 해열제나 진통제로 간단히 치료될 수 없다. 

살짝 호전이 되는 듯 보여도, 이윽고 끈질기게 재발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몸져눕는 일은 계절처럼 반복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지치지 않는 은혜의 추격이 평생 나를 쫓을 것이며, 

절대로 포기하는 법이 없는 그분의 사랑이 

결국 나를 치료하리라는 것을.



신학자는 전체 노선에서 

자신을 대적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오직 이 사실을 즐겨 받아들일 때, 

신학자도 또한 하나님을 위해 존재할 수 있다. 

-칼 바르트의 조언





#Jun. 25. 2018.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