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

창고지기들 2018. 5. 23. 15:59







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

유진 피터슨의 책, <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을 읽고.



묵시! 

그것이 신부의 베일을 쓴 채 

부피감과 무게감을 입고 내려온 적이 있었다. 

때는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 동부의 

한 뼘도 안 되는 구석을 하염없이 쓸기 만했던 시절, 

나는 적들과의 전투에서 

결국 지고 말거라는 생각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죽음은 보란 듯이 

하루하루 제 키를 더하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결국 그것의 먹이가 될 거라는 호언장담을 

증명하려는 듯 녀석은 퍽 필사적이었다. 

때문에 겁쟁이의 한숨은 그칠 줄을 몰랐고, 

애써 모아놓은 먼지 더미를 자주 날려버리곤 했다. 

대기 속으로 첩첩이 번져 짙어만 가던 먼지의 농담. 

하늘로부터 새하얀 빛줄기가 떨어진 것은 그 때였다. 


양성 굴광성 식물인 양 

내 손은 빛을 향해 천천히 뻗어나갔다. 

마침내 하얀 줄기가 손안에 붙들려주었을 때, 

그것은 해님과 달님의 동아줄처럼 

나를 끌고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났으나 

죽음으로 둘러싸인 곳보다 낫지 않을 곳은 없었다. 

잠시 후 높다란 죽음의 담장이 발아래 놓였다. 

나를 잡아먹지 못해 혈안이 되었던 녀석이 

발을 구르며 분을 내는 모습이 통쾌했다. 

그러나 잠시 뿐이었다. 

녀석은 작은 점 속으로 파묻혔고, 

윽고 도착한 곳에는 하나의 정경이 펼쳐졌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것은 지도였다. 

그것도 공간의 지도가 아니라 시간의 지도. 

장차 올 시간을 따라 순차적으로 이루어질 일들을 

공간적 메타포로 그린 알쏭달쏭한 지도. 

묵시문학이었다!



친숙해질수록 감각이 무뎌진다. 

조급한 만큼 집중력도 떨어진다. 

야심은 지성을 흐리게 만든다. 

이기심 때문에 시야기 좁아진다. 

불안은 의욕을 앗아간다. 

시기심은 사리 분별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의 느긋한 발걸음과 

요한의 묵시적 환상은 

나의 감각과 몸과 영혼을 새롭게 소생시킨다. 

이렇듯 우리를 각성시키는 힘이야말로 

요한계시록의 가장 뚜렷한 효과다. …… 

요한계시록 본문을 대할 때 나의 주된 관심사는 

“이게 무슨 뜻인가?”가 아니고 

“이 말씀은 내가 목사로 섬기고 있는 신앙 공동체 안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본서 중에서


이 책은 요한계시록을 목회적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목회의 특징들 중 하나는 반복성이다. 

매주 반복되는 예배, 반복되는 설교, 반복되는 사역, 

반복되는 일상, 반복되는 사건……. 

그 속에서 권태를 느끼며 시들어가는 것은 목회자도 매한가지다. 

이 때 필요한 것은 새롭게 함, 혹은 낯설게 하기다. 

저자에 따르면 싫증나는 현실에도 리프레쉬 버튼이 있고, 

그것을 누르면 권태로운 일상이 새롭게 전환 된다. 

그 버튼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만약 아시아의 일곱 교회 교인들이 

간신히 신앙을 붙들고 있는 비참한 상태에 있고, 

그들의 목사 요한이 최악의 시기를 잘 견디게 하려고 

미친 듯이 필사적으로 묵시에 손을 뻗치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이는 잘못 되어도 보통 잘못된 게 아니다. 

이 사람들은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자기의 생명이 부활의 기적 덕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당시에 주일마다 모여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생명을 받곤 했던 사람들은 

로마 제국에 가장 건강한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광채에 젖어 있었다. 

그들은 생명력이 차고 넘쳤다. 

-본서 중에서


저자가 포커스하고 있는 것은 초대교회의 건강한 성도들이다. 

그들은 시궁창 위에 피어난 때 묻지 않은 고고한 연꽃과 같다. 

그러나 내게 포커스 되는(!) 것은 깨끗한 연꽃이 아니라 

더러운 진흙에 묻혀가면서도 필사적으로 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연꽃들이다. 

그러니까 저자와는 달리, 나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현실을 

훨씬 비참하고도 암울하게 보고 있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간신히 신앙을 붙들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사도 요한이 묵시문학이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것의 특징인 판타지성을 통해 요한은 성도들이 

현실의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왔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바다. 

묵시문학이 장래에 반드시 일어날 계시를 

판타지적 요소들을 동원하여 그려내고 있기는 하지만, 

허무맹랑한 판타지 문학과는 전혀 다른 종류라는 것쯤은 말이다. 

암흑 같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창조된 판타지 문학과는 달리 

요한 계시록은 비참한 현실을 똑바로 마주보게 해주고 

힘겨운 시절을 믿음으로 견디는 동시에 소망으로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저자에게는 요한계시록을 

극한의 두려움과 고통을 견디게 하기 위해 제조된 

일종의 환각제로 취급하려는 자들에 대한 삼엄한 경계가 있었겠다. 

그렇다면 그를 지지하는 바이나, 

동시에 그는 일생 북미의 부유하고 편안한 나라의 목회자였다. 


북미 지역의 목회자로서 저자의 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었을 것이다. 

경제, 문화, 언어, 환경과 같은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저자의 양들이 믿음과 시각과 생명을 잃을 만큼의 

위협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보다는 내부적 요인인 매너리즘과 

속이는 영이 그의 양들을 훨씬 더 위협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들, 

비인간적인 교통 시설 혹은 보안의 구멍으로 생긴 

강도떼에게 수시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환경, 

마녀로 몰려 거리로 쫓겨나는 여자와 아이들, 

자신의 것이 아닌 그들의 모국어로 소통하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해야만 하는 어려운 상황, 

면역체계가 다른 현지인 성도들이 대접한 차이(tea)를 

거절하지 못하고 마실 때마다 설사와 복통에 

시달려야만 하는 환경 속에서 저자가 목회를 했다면 

과연 어땠을까? 

복음으로 부유해진 자가 없고, 

그것으로 성공한 자가 없으며,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성도들이 더 가난해지고 

더 곤고해지는 상황 속에서 요한계시록은 

단순히 현실을 새롭게 하는 역할로만 한정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죄로 인해 분산되었던 모든 것을 모아 하나님 앞에 가져간다. 

동시에 정신없이 살다가 잊어버린 하나님의 계시를 

모두 모아다가 우리 앞에 둠으로써 우리가 

찬양과 순종으로 그것을 바치게 한다. 

한 시간에 불과한 예배 시간에 

이 모든 것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매주, 매년 신실하게 계속하다 보면 

그 모두가 축적되어 총체성에 도달한다. 

따라서 상상력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상상력이야말로 모든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연결시켜 

무언가 총제적이고 온전한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이 일과 관련해서 지적인 능력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되지만 

예배 시 가장 큰 몫을 해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상력이다. 

-본서 중에서


요한계시록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예배의 책이다. 

그래서 무엇으로 시작했든지 결국 예배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언어, 문화, 환경이 몹시 다른 곳에서의 예배는 

모래를 씹는 것과 같다. 

열심히 집중해서 씹어도 남는 것은 복통뿐이다. 

그런 점에서 선교사에게도 목회자는 필요하다. 

선교 업적과 성취를 보고해야만 하는 후원 교회 뿐만 아니라 

선교현장과 일상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가는 예배를 

마련해줄 목회자도 필요한 것이다.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자신의 선교의 의미와 동시에 한계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선교에 끊임없이 참여할 수 있는 

상상력을 제공해주는 예배를 펼쳐줄 목회자가 절실한 것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성경 최후의 책은 다른 무엇도 아닌 요한계시록이다. 

죽음은 갈수록 치밀하게 사방에서 몰려들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들은 저들의 승리를 예고해댈 것이다. 

그러나 그 때마다 최후의 책 요한계시록은 

분연히 일어나 목청을 돋울 것이다. 


“눈에 보이는 공간의 마술 쇼에 속지 말라. 

깨어서 보이지 않는 시간의 지도에 마음을 기울이라.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록 모든 것이 죽어 나자빠질 것처럼 보이고, 

또 실제로 죽어 장사된다 할지라도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죽음 뒤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고, 

또한 아침 같은 영광이 고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버티라. 

흰 말을 탄 그리스도가 싸우고 있는 전쟁터가 

사실은 가장 안전한 곳이니 

그곳에서 힘써 싸우라. 

그대들이여 승리를 향해 전진하라!

Go to the VICTORY!”   





#May. 22. 2018.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