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돌 러시아어
숫돌 러시아어
세상 어려운(!) 이야기를 만났다.
<Три Поросёнка>.
워낙 세계적인 내러티브인지라
나로선 이미 반세기(??) 전에 읽어본 바다.
제목을 직역하면 <새끼 돼지 세 마리>,
의역하면 <아기 돼지 삼형제>.ㅋ~
결국 어려운 것은 내용이 아니라
러시아어 자체인 셈이었다.
엉킨 실 뭉치처럼 풀릴 줄을 몰랐던 겨울.
그 겨울에 쌓였던 것은 눈만이 아니었다.
실망감도 눈 더미 못지않았다.
과연 러시아어로 그분을 흠뻑 담아낼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그것으로
자유롭게 배우고 가르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적어도 의사소통만이라도
불편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다양하게 변주된 의구심이
마음속을 번번이 들락거렸다.
게다가 처음과는 달리 언어에 별다른 진척이 없자,
마음이 실망감에 갇히길 반복했다.
따지고 보면 아기와 다름이 없었다.
우크라이나 땅에 발을 붙인지
일 년도 되지 않으니 말이다.
아기라면 응당 생사여탈권을 부모에게 맡기고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제 본분을 다하는 것일 테다.
그런 점에서 나의 의구심은 분수도 모르고
높은 수준을 넘보는 옳지 않은 종류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세상에는 마냥 아기일 수만은 없는
가련한 존재들이 있기 마련이고,
선교사도 그 어디쯤에 속한다.
생존을 위해 급히 자라버린 어른 아이처럼
그들의 마음은 조급해지기 일쑤다.
그래서 높은 깜냥을 가볍게 넘보고,
급히 자란 기대치만큼 길게 드리워지는
괴로움을 끌어안고 몸부림치곤 하는 것이다.
고초는 주기적으로 난입했다.
‘이제 좀 할 만한데!’ 하는 생각이 싹을 틔우자마자
바닥없는 격변화와 말문을 막는 어려운 동사들이 몰려와
한바탕 난동을 부렸다.
두들겨 맞은 자신감은 몸져눕기를,
마음은 폐허가 되기를 되풀이했다.
그 와중에 삶은 단순을 지나 궁핍에 가까워졌다.
한국어 창고를 폐쇄하고, 러시아어 창고를 지어
전혀 새로운 언어를 들이는데 전념했던 까닭이었다.
매일 들여다보고 상대하는 언어는
모조리 기본 중의 기본.
그것으로는 도화지에 선은커녕
점 하나 그리기에도 벅찼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도다.
(사 49:4)
러시아어를 상대할 때면,
밑 빠진 독이 어김없이 등판했다.
아무리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어도
차오르지 않는 독 앞에서 마음은 요란하게 무너졌다.
헛된 수고, 무익한 노동, 쉽게 차오르는 절망감.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선교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공연한 수고로 힘겹게 버티고 있던 어느 날
그분이 찾아오셨다.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사 49:1-4)
새벽이 검푸른 얼굴을 세수를 하기 전,
저만치에 서계신 그분이 발견되었다.
퍽 반가웠으나, 서러운 마음도 못지않았다.
베드로처럼 냉큼 서두를 수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다지오로 그분께 다가가고 있던 손에는
바가지가 들려있었다.
여기저기 긁힌 자국들이 빼곡했다.
새로 들인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그렇게 낡았다는 게 놀라웠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분은 뭔가를 불쑥 내미셨다.
숫돌이었다.
바가지를 내려놓고 숫돌을 받아들고는
비로소 그분 얼굴을 뵈었다.
입 꼬리에 벌써부터 대낮 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손안의 숫돌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갑자기 숫돌이 토르의 망치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쩍! 소리와 함께 바가지가 박살났다.
얼얼함이 얼굴에 퍼졌다.
분명 러시아어에게는 그 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것이 흥미를 유발시키고,
더 열중하게 만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골자는 내게
헛된 수고, 무익하게 공연히 힘만 빼는 노동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던 낡은 바가지는 그것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그분은 바가지 대신 숫돌을 손 안에 들려주셨다.
그것은 어그러진 생각과 왜곡된 이미지에 대한
일종의 교정이었다.
그러니까 러시아어는 칼과 화살을 날카롭게 하는 숫돌처럼
나를 갈고 닦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통해 나는 성실한 수고, 존중하는 자세,
겸손한 태도를 몸에 배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 준비로 한창일 때,
맥락 없는 웃음이 팝콘처럼 후두둑 터져 나왔다.
곁에 있던 남편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동방 교회 전통의 영성에 관한
두꺼운 원서를 읽고 있던 그였다.
요사이 나는 요한계시록을 목회적 관점에서 서술한 책을
달팽이 걸음으로 읽고 있었는데,
그런 우리가 <아기 돼지 삼형제> 앞에서
쩔쩔매는 꼴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깔깔대며 웃다보니
통쾌감이 번져 오랜만에 시원해졌다.
유쾌한 웃음은 겸손이 선사할 수 있는 종류다.
그래서 간절히 소망해 본다.
유쾌한 웃음, 통쾌한 반전,
그리고 상쾌한 기분이 꾸준히 피어나기를.
겸손이 주름처럼 몸에 고이 들여져
오롯이 내 것이 되어주기를.
키리에 엘레이손!
# May. 8. 2018.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