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arT

그냥 사랑하는 사이

창고지기들 2018. 2. 21. 17:57




JTBC 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를 보고.








#1.


-힘들어 보이셔서요. 

  그럴 땐 혼자 계시지 마시고 저희 기도원에 나오세요. 

  지금은 힘들더라도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어요. 

  신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주십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은요?


-그건 기도로 이겨낼 수 있어요.


-이기지 못해서 평생 괴로운 사람들은요?


-네?


-못 견디고 벌써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준대요?


-아.


-안 믿을래요.

 


싸늘하게 등을 돌린 문수. 

계단을 따라 산동네로 올라간다. 

전단지를 돌리며 종교 비즈니스에 열을 올리던 여자. 

계단을 따라 아랫동네로 내려간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낀 나. 

어쩔 줄을 모른다. 

세상으로 내려가는 여자와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문수의 뒷모습을 한동안 번갈아 바라본다. 

때 마침 밀려오는 것은 부끄러움. 

일반화의 오류를 조장했던 게으름이 

귓불에 빨간 불을 놓고 달아난다.








#2.


에스몰을 무너뜨린 것은 거대한 악의 소행이 아니었다. 

소소하고 별 것 아닌 것 같은 작은 불의들이 

하나 둘 모여 커다란 건물을 무너뜨리고 만 것이다. 

참상의 결과 48명이 목숨을 잃었고, 

후유증이 만든 탄탄한 감옥에 갇힌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은 

불행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끔찍한 고통과 지독한 슬픔을 견딜 수 없어서 이미 죽어버린 사람과 

스스로를 자책하다 못해 학대하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이 

일상을 가득 메웠던 것이다. 


드라마는 이러한 사건을 배경으로 

유가족인 동시에 생존자인 두 주인공인 강두와 문수를 중심으로 

느닷없이 찾아온 삶의 상처와 상실을 치료하고 회복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과정은 의례 그렇듯 쉬울 수가 없으나, 아름답지 않을 수도 없다.








#3.


에스몰이 무너지던 날, 문수가 잃은 것은 동생만이 아니었다. 

무너진 건물더미에서의 기억마저 잃었다. 

고통스런 기억을 무의식에 집어넣고는 

우악스럽게 봉인해 버렸던 것이다. 

이후 문수는 체한 아이마냥 하얗게 질려서는 

무엇이든 참고 받아들이는 어른 아이로 성정했다. 

이 과정에서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쪽은 문수였으나, 

오히려 자식을 잃은 고통을 술로 대신하려는 엄마를 

돌보는 쪽이 문수였다. 

젊고 싱그러운 그녀가 단맛을 싫어하는 것은 

어쩌면 동생을 두고 혼자 살아 돌아온 죄책감의 심술일지도 몰랐다.



그날 이후, 강두는 아버지를 잃었고 

그 자신은 마지막 생존자가 되었다. 

비록 십년이나 지난 일이었지만, 

강두는 그날의 일들을 한 개도 잊지 못했다. 

극악한 기억은 그를 매일 무너진 건물 속으로 밀어 넣었고, 

그는 살아남기 위해 매번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쳐야만 했다. 

사채업자와 같이 매일 찾아오는 고통스러운 기억은 

강두로 하여금 약과 폭력으로 자기 몸을 학대하게 만들었고, 

그를 성인이 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이처럼 달콤한 주전부리(아이스크림과 같은)를 

좋아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십년 후, 무너진 에스몰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즈음 문수와 강두는 만났고, 

희생자들의 추모비를 세우는 일로 얽히면서 

그들은 서로의 고통을 통해 자기 고통과 대면할 기회를 얻었다. 

심리적 기제가 만들어낸 억압과 부인과 무시와 왜곡에서 벗어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한 후, 마침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창조한 치유의 힘으로 

문수와 강두는 비로소 제 나이를 찾게 되었다. 

빛나고 아름다운 청춘을.








#4.


자기 슬픔에 겨워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문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문수 엄마와 아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서로를 물고 뜯었던 청유건설 집안사람들. 

피를 나눈 그들 가족들에 비하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강두와 주변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는 가족이었다. 


마마라 불리는 할멈, 술집 마담 누나, 

동생인 강두를 형이라 부르며 따르던 모자란 듯 비범한 상만, 

강두의 쪽방 주인 아주머니인 동시에 끼니를 챙겨주던 상만 엄마.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지키면서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아껴주었다. 

강두가 그렇게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족은 아니지만 더 가족 같은 이들의 애정 때문에.


할멈의 소천 후, 

그녀가 마음으로 낳은 가엾은 자식들이 한데 모인다. 

살아 생 전 그녀가 마지막까지 일했던 불법 의료 시술소에 모여 

그녀가 남긴 유언 같은 주전부리를 먹으면서 

그들은 저마다 할멈을 추모했다. 


-갈 데 없는 사람들한테는 여기가 마지막 보루라고, 알간?(할멈의 말)


공교롭게도 할멈의 불법 의료 시술소의 이름은 ‘성지’였다.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았던 곳이 성지였던 셈이다. 

의료보험 없이도 치료와 약을 받을 수 있는 곳, 성지. 

그곳에 의지할 데 없는 인생들이 한데 모여 

할멈이 남기고 간 주전부리를 먹고 마신다. 

그것이 교회로 보였던 것은 직업병 탓일까?


훗날, 불법 의료 시술소 '성지'는

합법적인 의료원이 된다.

카타콤이 교회가 되었던 것처럼!








#5.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인칭 대명사 ‘너희’의 일차적 지시 대상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위의 말씀에 정확히 부합되는 사람, 

그러니까 감당할 시험 밖에 당하지 않은 자들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다. 

다음으로 지시 대상을 확대한다면 

성경을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기독교인 독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너희’를 세상의 모든 사람으로 확대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일반화의 오류를 생산하기 쉽다. 


세상에는 분명히 감당하지 못할 시험이 있고,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당하는 사람이 있으며, 

그 결과 죽는 사람이 기어이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지극한 고통으로 쓰러져 죽어가는 자들에게 

입바른 소리나 지껄이는 졸렬한 치밖에 될 수 없으며, 

나아가 주의 긍휼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긍휼, 그것은 시험받는 자들의 고통의 자리에 

함께 있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탈출시킬 수는 없어도 

그들이 홀로 고통 받지 않도록 하는 마음이다. 

그 결과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소멸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도록 도와준다. 

지독한 고통을 말로 풀어낼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것을 하염없이 들어줌으로써 

고통의 거대한 덩어리를 조금씩 쪼갤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는 일면 고집스럽고도 잔인했다. 

매 회마다 강두와 문수가 겪은 재난을 

시청자들에게 집요하게 선보였던 것이다. 

강두와 문수가 겪은 고통을 조금씩 떼어 받아먹은 일은 

몹시 불편한 일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옳았다. 

강수와 문수의 고통을 똑바로 지켜보지 않았다면, 

그들의 고통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불편해도 피하지 않는 것, 

그것이 긍휼의 시작임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6.


결국 강두와 문수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로 추모비를 만든다. 

흉측한 조각들을 하나 둘 맞추어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만들어낸다. 

삶이란 찢겨지고 어그러진 참담한 소재들을 재료로 삼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다쳤을 때보다 치료받을 때 아팠던 게 더 끔찍했어요. 

  이렇게 아플 바에야 차라리 잘라내 달라고 했어요. 

  없는 셈 칠. 테니까. 근데 이렇게라도 없었어 봐요. 큰일 날 뻔 했지. 

  그 때 의사가 그랬어요. 

  망가진 델 고치려면 망가뜨릴 때보다 더 큰 고통이 따른다. 

  그래야 상처가 아문다고.

  (강두의 말)


기독교의 새 창조는 태초의 창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 

태초의 세상은 말씀으로 깔끔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재창조는 죄악으로 망가지고 무너져버린 세상의 조각들을. 가지고

새롭게 복원하는 것이다. 

차라리 모두 없애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편이 쉬울 것이다.

(하나님이 그럴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하나님은 어려운 편을 선택하셨다. 

원형의 모습을 잃어버린 산산이 부서진 조각들을 모아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기로 하셨던 것이다. 

방법은 하나였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인간의 모든 죄를 처리한 후, 

무너져버린 세상의 조각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아 

완전히 새롭게 복원하는 것.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택 덕분에 

나와 같은 인생도 소망 중에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삶이 흉측하게 깨지고 망가졌을 지라도 

그 어느 것 하나 버려지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새 창조의 재료가 되어 그분의 손길 안에서 

온전히 새로운 것으로 변화될 것이기에. 










#7.


-살아남아서 다행이야.(강두의 말)


살아남은 자의 불행으로 하루 버티기도 버거웠던 강두. 

그의 입에서 마침내 터져 나온 안도의 한숨. 

문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전복적(!) 고백에 등장하는 십자가, 

나는 그것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또한 감독이 의도한 소품이었는지 아닌지

(그러나 감독이 의도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자기 화면의 여백을 허투로 쓰는 감독은 흔치 않을 것이기에) 알 수 없었으나, 

내 눈엔 어느새 십자가가 가득 고여들었다. 


문수의 말대로 기적, 

곧 구원은 누군가(!)의 불행으로 지어진 것이다. 

그 기적, 그 누군가의 불행으로 강두가 다시 살아났고, 

그래서 문수도 다시 살아났다. 

그렇게 고통 없는 치료, 사랑 없는 다행, 

죽음 없는 부활은 가능할 수 없다고 

아름다운 두 청춘 곁의 십자가는 조용히 읊조리고 있었다.












#8.


일전의 읽었던 <나의 첫 여름>에서 존 뮤어는 말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조금도 자연스럽게 않은 곳에서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인도를 받는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강두와 문수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우연투성이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면 

절묘한 우연들이 가리키는 것은 필연과 운명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강수와 문수는 기어이 다시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고, 

상처의 얼마를 치유 받게 되었으며, 

지긋지긋하던 생을 마.침.내. 감사하게 되었다. 


자신들을 사랑하는 이유를 묻는 문수에게 

강두의 대답은 ‘그냥’이었다. 

합리적 이유를 댈 수 없는 미스터리, 

그 신비가 그들 사랑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강수와 문수가 사는 세상은 

신비한 은총이 가득한 세상이었다. 

이것은 강두와 문수와 더불어 

그들이 사는 세상을 만들어낸 창조주인 작가가 

좋은 사람이라는 증거다

(드라마 속 캐릭터들이 하나 같이 

착하기 그지없다는 것도 그 증거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와 

작품을 아름답게 형상화시킨 감독과 스탭들이 

참 고맙다.





#Feb. 7. 2017.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