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갈릴리 우크라이나
나의 갈릴리 우크라이나
잔치가 끝났다.
나른한 아쉬움이 감돌았다.
기분 좋은 꿈에서 깨기 싫은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때문에 초대받은 자들은 귀가를 서두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늦는 법도 없는 그들이었다.
미적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을 때였다.
잔치 내내 망설이던 그녀의 입술이 마침내 열렸다.
각자의 길로 돌아가려던 자들에게
축복의 말이 폭포수 같이 쏟아졌다.
수런거리던 장내가 일순간 얼음이 되었다.
일종의 답례품인 각자의 형용사(축복)를 챙기고서야
잔치는 완벽히 해빙되었다.
“로고스씨와 연애하기 바쁜 연애전문,
변방의 여장군 지장 이상예”
내게 주어진 것은 ‘변방의 여장군 지장’이었다.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다.
특별히 ‘변방’이라는 말이 별로였다.
상당히 닳기는 했어도
중심을 갈망하는 마음이 여전하다는 방증이었다.
상대를 존중한다면
내키지 않아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선물이다.
해서, 버리지도 못하고 그것을 이민 가방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은 채 우크라이나로 향했다.
잊고 지내던 그 날의 형용사가 등장한 것은
도착한 땅에서 보따리를 풀었을 때였다.
손바닥만 한 웃음이 피식 터져 나왔다.
그녀의 축복은 틀림이 없었다.
우크라이나(Україна)라는 국가명은
У + країна의 합성어로 ‘우리의 땅’ 또는 내륙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지금도 러시아의 변방쯤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어/러시아어인 країна/край가
갖고 있는 뜻 중 하나인 변방, 끝자락 등의 의미로부터
변방에 있는 나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우크라이나인에게 이런 말을 하면 기분 나빠한다.
폴란드어로 우크라이나는 ‘주변의 땅’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 서부 우크라이나는 대부분의 역사 동안 폴란드 땅이었다.
-나무위키 중에서
중심의 괴로움이 내 몫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애써 알고 있었다.
내 것은 오히려 변방의 외로움 쪽이다.
그런 점에서 그분의 결정은 무오(無誤)하다.
이름 자체가 변방적인(!) 우크라이나를
내게 낙점하여 주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그분이 선호하시는 캐릭터들이
주로 변방의 비주류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치들이 그분 이야기의 주인공들로
근면히 캐스팅 되어 왔음은 물론이다.
위대한 구원의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나사렛 슬럼 출신에,
예루살렘의 변방인 갈릴리에서
주로 활동하지 않으셨던가!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사 9:1)
갈릴리는 과거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땅이었다.
외세(아람과 앗수르)에 수도 없이 짓밟혔던 땅이자,
예루살렘의 변두리에 지나지 않았던 땅 갈릴리.
우크라이나는 그 땅과 닮았다.
그것은 지정학적으로 두 마리 고래인
러시아와 유럽 사이에 끼어 있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유럽에게 변방 취급을 당하면서
지속적인 학대와 착취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래서 러시아와 유럽 전역에 빵을 공급하는
거대한 곡식 창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들은 기근으로 굶어 죽어갔던 것이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 (사 9:2,6a)
나의 갈릴리 우크라이나는
무례한 중심들이 제멋대로 변방으로 규정한 나라다.
그러나 나의 갈릴리는 애초부터 중심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스스로 넉넉하고 평화로웠던 탓에
무수한 외세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녀는 그 어떤 나라도 침략한 적이 없었다.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에 온 이유는 분명하다.
변방의 땅 갈릴리에서 펼쳐지는
구원의 이야기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전에 학대받고 고통당하던 갈릴리가
그분으로 인하여 영화롭게 되는 것을
목격하기 위해서다.
“저녁 먹게 수저 좀 놔.”
먼저 방에서 나온 아이가 수저를 놓는다.
수고롭게 차려 놓은 저녁 밥상에
수저를 놓는 일로 상차림은 완성된다.
분명 그것은 고작에 불과한 일이지만,
고작일 수만은 없는 일이다.
어떤 식으로든 상차림에 참여한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좀 더 즐겁게 식사에 참여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나의 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께서 열심히 차려놓으신 밥상에
수저 올려놓는 정도의 일,
그래서 나의 갈릴리를 구원하시는 주의 역사를
다른 이들보다는 조금은 더 기뻐하는 것,
그것이 나의 갈릴리 우크라이나에서의 나의 사역일 것이다.
할렐루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사 9:7b)
#Sep. 16. 2017. 사진&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