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노래
이승우의 소설, <지상의 노래>를 읽고.
사실, 이단에 빠질 위험은 과학 쪽이 더하다.
꾸준한 잘못을 통해 독선의 대명사로 전락은 했지만,
그래도 신학은 초월과 내재를 모두 인정한다.
그러나 과학은 초월은커녕 내재 중에서도
측량할 수 있는 것만 알아주는 것이다.
과학에게 초월은 비현실 내지는 잘해야 상상,
아니면 망상으로 치부 된다.
그러나 신묘한 노래는 천상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지상에도 노래는 있고,
그것이 악기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공기의 파동 이상임에는 이견이 없다.
똑같은 노래도 연주자와 가수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노래(음악)는 시간의 예술인 동시에
신을 섬기는 예배의 한 형태다.
이승우의 소설, <지상의 노래>는
이와 같은 노래의 양 측면을 모두 고려하고 있다.
그것이 그의 노래가 제창일 수 없는 이유다.
지상의 노래는 4부 화성
(강상호, 후, 한정효, 차동연의 이야기)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화성은 잘 짜인 구조와
기법 상 패러독스와 아이러니로 한 줄 씩 정교하게 엮여 간다.
그래서 다 읽고 난 독자를
어느새 완성된 태피스트리 앞에 세운다.
성취된 두툼하고 뭉클한 작품 안에는
역사(과학)와 신학이 절묘하게 엉겨있었다.
오래 전, 교회 성가대에서
소프라노 역할을 맡은 적이 있었다.
아마추어(!) 소프라노는 메인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불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다른 화성과의 조화 보다는
기필코 최고음을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사명감(?)으로 불타는 것이다.
하모니의 기쁨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지휘자에 의해서 강제로 알토로 좌천(?!)된 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마추어 근성이 남아 있는 나는
메인 라인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 부르고 싶은 멜로디 라인은 단연코 후의 이야기다.
후에게 집중하게 된 이유는
개인적인 삶의 배경 때문일 것이다.
오랫동안 묵상하는 일에 삶을 바쳐온 내게,
그것은 결국 삶을 누비는 재료가 되어버렸다.
묵상하지 않는 삶을 상상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게다가 단 번에 해치울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은 평생의 업이 되었다.
삶을 위한 일이기에, 아마도 묵상이 끝난다면
내 삶도 더 이상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
삶이 묵상이 된 내게 이 책은 묵상을 위한 출중한 교재였다.
그런 와중에 ‘묵상하는 순례자 후’의 이야기는
내겐 당연히 매혹적일 운명이었다.
성경이 자신을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라는
천산 공동체 형제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무엘하 13장을 필사했을 때,
후는 결국 자신을 보고 만 것이다.
암논, 다말, 압살롬이 등장하는 근친강간(!),
피의 복수 이야기에서 성경은 후를 압살롬으로 캐스팅 했다.
후는 압살롬에 대한 지속적인 묵상을 통해
자신이 다말 역할을 맡은 연희누나를 무의식적으로
깊이 연모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세월을 따라 후는
또 다시 사무엘하 13장 이야기에 캐스팅 되었다.
이번에 맡은 역할은 암논이었다.
마침내 그는 이복누이 다말을 처참하게 강간하고 유기한 암논이
그의 무의식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후의 묵상이 거기서 멈춘 것은 개인적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나아가 후는 다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암논인 사모님과 친구(?!)인 헤라 헤어숍 원장의 꼼수로
강간을 당하고 유기되었다.
물론, 자신 역시 그것을 즐겼다고 여겼으나,
거대한 권력(장자권을 가진 왕자, 권력자의 부인)의 손아귀에서
유린을 당하고 처참하게 버려졌다는 측면에서
후는 다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묵상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후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았다.
1차 깨달음은 그로 하여금 천산 공동체에
스스로 정주(定住)하게 만들었으며,
이어진 2차 깨달음은 그를 순례자가 되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필의 3차 깨달음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이리저리 상상해 봐도 극적인 변화는 없었을 것 같다.
대신에 그를 무섭게 짓눌렀던 죄책감의 얼마쯤은
해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완전한 가해자와 완전한 피해자가 있을까?
누구든 집단과 개인 간의 죄에 연루되어
피해를 입히기도 하고 피해를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후 역시 잠재적 가해자인 동시에
강간당하고 버려진 상처 입은 연희 누이 중 하나였을 뿐이다.
세 평 남짓한 방에 엉겨 있는 수십 구의 유골들이 발굴되었다면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을 것이고, 되어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역사적 사건으로만 이해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흔두 개의 방에 나뉘어 누운 채 발견됨으로써
천산 공동체의 형제들은 역사의 지평 너머 다른 차원으로
후대 사람들의 시선의 방향을 돌렸다.
차동연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세상의 권력은 그들의 구별된 공간인
천산을 침범하고 파괴하여 카타콤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침범하고 파괴하는 권력이 행사되는
이 세상이야말로 카타콤에 다름 아님을
그들의 구별된 삶과 특별한 죽음으로 증거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부정되었지만,
그전에 세상은 그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세상은 그들을 버렸지만, 그전에 그들은 세상을 버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버려지는 것이
그들의 세상을 버리는 방법이었다.
세상은 더 이상 그들의 믿음과 소망을 간섭하지 않았다.
-본서 마지막 부분
참혹한 사건일수록 역사에게는 빛나는 훈장이 된다.
역사적 교훈이라는 미명 아래,
무참한 사건은 오래도록 호들갑스럽게 회자되는 것이다.
수십 구의 유골들이 고작 세 평 남짓한 방에
서로 뒤엉킨 채 발굴 되었다면,
역사의 진열장에는 작은 훈장 하나가 추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악행이 어디 그만 못한 적이 있었는가!
작은 훈장은 눈 한 번 꿈쩍하기도 전에 빛바랠 것이 뻔하다.
다행스럽게도 처참한 역사의 재료는
순례자들(한정효와 후)의 손 안에서 특별하게 다루어졌다.
뒤엉킨 수십 구의 유골들이 한 구씩 풀어져
성경 본문이 필사된 방(관)에 뉘어졌다.
즉, 뒤엉킨 시신이라는 내재하던 역사가
말씀 아래서 역사 너머의 초월을 가리키는
신비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다.
세상에게 버려짐으로 오히려 세상을 버린 자들,
세상의 압제를 통해 도리어 세상을 넘어간 자들의 찬란함이
카타콤(무덤)을 체메테리움(쉬는 곳)으로 변화시키고 만 것이다.
문단(!)마다 서려있던
불확실한 우아함은 독서의 풍미를 더해주었다.
정확하게 표현하려 하면 할수록 불확실해지는 아이러니,
불확실한 것이 사실은 가장 확실한 것이라는 아이러니를
체험하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뜻밖의 횡재를 하고 말았다.
다른 책도 아니고 소설책을 통해서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넘어가기 위해서,
세상에 살면서도 그것과 상관없이 살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충만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으니 말이다.
#Jun. 20. 2017.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