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지기들 2017. 5. 27. 02:18






계수할지니



#1.


광야의 이스라엘이 국가일 수는 없었다. 

백성은 마련되어 있었으나, 

눌러앉을 영역이 없었던 것이다. 

뜨내기 민족, 고작해야 이스라엘은 그것이었다. 

백성과 영역에 이어 

국가를 구성하는 나머지 요소는 주권이다. 

신통하게도 이스라엘의 경우 

백성이 존재하기 전부터 주권은 있었다. 

즉, 이스라엘은 절대왕정 국가로, 

그들의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었고,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살아있는 권력에서 율법이 나왔다. 

권력의 대행자 모세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동시에 그것으로 그들을 다스렸다. 

연속 동작으로 이스라엘의 주권자는 국책 사업을 시행했다. 

인구조사, 그것은 군대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를 지키는 한편, 

눌러앉을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서 군대는 매우 필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 

각 지파의 각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 한 사람씩을 

너희와 함께 하게 하라(민 1:1-4)

 

문자적으로 민수기(民數記/Numbers)는

‘백성들의 수를 센다’는 뜻이다. 

제목대로 민수기는 총 두 번(1-4, 26장)의 

대대적인 인구조사와 그 결과를 적고 있다. 

이름값을 하려는 양 본문은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계수할지니, 계수하되, 계수하니, 

계수하였더라, 계수된 자는, 계수된 자의 총계는’. 

시작부터 곤혹스러웠다. 

숫자에 약하고, 셈이 느린 자가 바로 나였다. 



#2.


여러 날을 두고 그리 즐겁지 않은 본문을 

터벅터벅 듣고 있었을 때, 

문득 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맥락 없이 피었다 지는 부류였다. 

별 생각 없이 다가가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요상한 녀석이었다. 

벌이나 나비가 아니라 귀를 유혹하기 위해서 

예쁘게 피어난 듯 보였다. 

향기대신 소리를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암술머리가 입술처럼 오물거리면서 말했다. 

“계수할지니, 계수하되, 계수하라!”


귀를 기울인 것이 화근이었다. 

귓속에 이어폰이라도 꽂은 듯 

맥락도 없이 핀 꽃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었다. 

“계수할지니, 계수하되, 계수하라!”  

귓속에서 떼어내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것은 집요하게 귀불을 물고 늘어질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분께 

녀석의 목소리를 따라 질문을 드렸다. 

“주님, 대체 무엇을 계수하라는 것입니까?” 

보랏빛 자카렌다 꽃잎이 뚝뚝 떨어지듯 

녀석의 목소리가 뚝 끊긴 것은 그 때였다. 

세상은 다시 고요해졌다. 

곧바로 평상심은 회복되었고, 

일상이 고요하다 못해 적막해지자 

그분께 드렸던 질문이 서서히 잊혀져갔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Teach us to number our days, 

that we may gain a heart of wisdom(시 90:12)


나흘 뒤, 우매자의 질문에 대한 그분의 답변이 도착했다. 

“너의 날을 계수해 보아라!” 

계수의 대상인 나의 날들이 무엇인지 썩 와 닿지 않았다. 

나의 지나온 날들인지, 아니면 살아갈 날들인지, 

아니면 그 전부인지 몰랐다. 

지나온 날들이야 계수가 되겠지만, 

살아갈 날들은 불확실하니 계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을 때, 한 차례 바람이 불어왔다. 

“중요한 건 계수의 대상이 아니라, 계수 자체란다.” 

일전에 읽었던 조지 맥도날드의 책 

<북풍의 등에서>에서 만난 적 있던 북풍(지혜)의 음색이었다.



#3.


12살 하진군은 

일전에 맞이한 어린이날을 가리켜 

‘마지막 어린이날’이라고 했다. 

그의 말의 숨은 의중은 뻔했다. 

어린이날 기념으로 갖고 싶은 게임기를 사달라는 것이었다. 

알아보니 가격이 꽤 나가는 물건이었다. 

가난한 부모가 주저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그는 그동안 모아온 상당한 용돈을 내놓았다. 

십 달러, 이십 달러, 삼십 달러 …. 

소위 말하는 매칭 펀드를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아들 녀석이 기특한 부모는 피식 웃으면서 

그의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었다. 

결국 하진군은 자기 생의 마지막 어린이날에

(13살이 되면 틴에이저, 곧 청소년이 되기에) 

가진 돈의 한계를 훌쩍 뛰어 넘는 값비싼 게임기를 갖고야 말았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그 조상의 가문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이스라엘 자손이 다 계수되었으니 

계수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었더라(민1:45-46)


많든 적든 계수의 대상에는 한계가 있다. 

시작과 끝이 선명한 행위가 계수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경우 하나, 둘, 셋으로 시작한 계수가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에서 끝났다. 

무려 60만이나 되는 군대였으나, 

사실 따지고 보면 형편없는 오합지졸(烏合之卒)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별도의 훈련을 받을 만 한 처지도 아니었다. 

그저 실전을 통해서 전쟁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고 체득할 수 있을 거라는 짐작만 있었다. 

그러나 계수를 통해 한계가 명백해진 이스라엘은 

그 한계를 뛰어 넘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인원의 한계, 전투력의 한계, 전략의 한계 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호와의 군대였던 것이다. 

계수 된 유한함에 

계수할 수 없는 여호와의 무한함이 매칭 되었던 탓에 

그들은 기어이 가나안을 차지하고 말 것이었다.



지혜는 한계를 아는 것이다. 

한계 위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지혜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날들을 

계수의 대상으로 만드신 분을 기억하고 경외한다. 

시작이 있었으니 끝도 있을 것이 나의 날들이다. 

그러니 인간의 마땅한 본분 곧,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무한하신 하나님을 경외할 일이다. 

짧고 보잘 것 없는 나의 시간에 

자신의 영원을 더해주실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일이다. 



계수의 대상이긴 안식년도 마찬가지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안식년이 끝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선교 여정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아우르면서 

나의 날들은 결국 끝을 향해 치달을 것이다. 

잠시 눈을 감고 그 끝을 헤아려 본다. 

저 멀리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에서 

찬양이 노을처럼 울려 퍼진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살아 있는 날들 동안 

계수할 수 없는 주의 영원하심을 송축하라!”




#May. 24. 2017.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