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를 읽고.
1999년 런던
브리오니 탈리스
이쯤 되면 작가는 대단한 마술사다.
키보드 속 ‘shift’ 버튼을 누르듯 고작 짧은 두 줄로
독자에게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를 선사하는 것이다.
흥미진진한 1편을 시작으로 지난한 2편을 거쳐,
안쓰러운 3편 끝에서 만난 위의 짧은 두 줄은
491 페이지 분량의 이야기를
순식간에 소설 속의 소설로 만들어 버린다.
이 대목에서 독자는 잠시 책을 덮지 않을 수 없다.
지금껏 읽어온 삼각형 이야기에 기둥을 세워
삼각기둥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술사답게 작가는 트릭에 능란하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소설책인 줄 알면서 읽고 있던 독자에게
작가는 ‘네가 본 것은 사실 소설일 뿐’이라고 슬쩍 말한다.
재밌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의 폭로가
독자에게 충격을 준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작가의 엄청난 재량 때문이다.
그는 마치 영화를 상영하듯이 이야기를 생동감 넘치는
멋들어진 문장으로 독자를 현혹시킨다.
작가의 요술에 걸린 독자가
소설을 실제 이야기로 읽는 것은 물론이다.
다음 순간 작가는 독자에게
그것은 소설일 뿐이라고 물벼락을 안긴다.
덕분에 독자는 이후의 이야기인 ‘1999년 런던’을
마치 수기(手記)인 양 읽게 되는데, 이 또한 작가의 속임수다.
그것은 일종의 착시 효과로,
이도 저도 소설이긴 매 한가지다.
물론, 이 모든 작가의 트릭을 이해하고 웃어넘기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본서 중에서
속죄는 지은 죄를 물건이나
다른 공로 따위로 비겨 없애는 것이다.
소설을 써서 로브와 세실리아에게 지은 죄를
없앤다는 것은 얼토당토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리오니는
자기편에서의 최선인 소설 쓰기를 통해서 속죄를 하려고 했다.
특별히 브리오니는 자기 소설 제 2부에서
누명을 쓴 로브가 전쟁에서 살아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상세하게 그려냈다.
작가로서 그녀는 로브의 심적이고 육체적인 아픔과 고통을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Compassion,
곧 함께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나아가 그녀는 자기 소설의 결말을 해피 엔딩으로 맺었는데,
개인적으로 이 결말은 소설 전체의 완성도를 헤치는 것으로 보였다.
느닷없는 해피 엔딩을 목격하면서
석연치 않은 무언가를 어렴풋이 눈치 챘음은 물론이다.
아마도 브리오니는 작품의 완성도를 희생시키면서 까지,
기어코 속죄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작가 이언 매큐언은 59년 동안 무던히 속죄해왔던
브리오니에게 선물을 주었다.
점차적으로 기억을 잃어버리는 혈관성 치매에 걸리게 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재앙이겠지만,
브리오니에 그것은 회개의 대가일 것이다.
죄책감에 시달리게했던 기억들을 말끔히 지워내고,
그녀는 비로소 만족스럽게 평안할 것이니.
붓질 한 번은 색, 형태, 질감, 양감, 원근감, 뉘앙스 등
수많은 결들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한 붓질들의 반복적인 겹침으로
캔버스는 근사하고도 거대한 작품이 된다.
때때로 작품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감상자는
현란한 붓질들의 향연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을 받기도 한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글 한 줄, 문장 하나가 캔버스의 무수한 붓질처럼,
태피스트리의 수많은 색실처럼 묵직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일궈냈다.
문장 하나, 하나마다 치열한 아름다움이 가득했다.
꼼꼼히 읽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재밌고도 아름다운 소설 한 권을 읽었다.
게다가 소설 제목이 무려 <속죄>였기 때문에
풀러 신학대학원 도서관에서 읽는데 전혀 부담이 없었다.ㅋ
성 금요일이다.
하나님이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창조주가 구원의 주가 되어 피조물 캐릭터들을 구원하신 이유는
미안함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 때문이었다.
그 미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일개 피조물 캐릭터가 되셨고,
십자가를 통해 단번에 인류의 모든 죄를 속죄하셨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것은 전능한 속죄의 다른 이름이리라.
#Apr. 14. 2017.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