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선교
다시 선교
‘그래, 선교는 저런 분들이 하는 거야!’
선교가 삶의 목적인 분들을 만날 때면, 슬쩍 드는 생각이다.
진짜 선교사 같은 그들 앞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라곤
멋쩍은 마음에 모자란 표정을 짓는 것이다.
물론, 4년 반 동안 케냐 선교사로 사역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
말씀에 순종한 것뿐이었다.
단 한 번도 선교가 삶의 목적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이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대단한(?!) 선교 활동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 주께서 준비시키신 것을
사용하게 될 거라는 가늠이 있었을 뿐이었다.
예상은 보기 좋게 적중했고,
우리는 준비 된 것으로 근면히 일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선교지 케냐로 보내신 것은
일을 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뼈아프게 깨달았던 것이다.
안식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진로를 허락해달라고
간구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기도하면서 여러 길들을
탐색하고 모색해보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결과는 코헬렛이 지어 부른 후렴구였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시도들이 헛될 뿐이었다.
가능성이 모조리 등을 돌려버렸을 때,
우리는 최후의 선택을 계획하고 있었다.
선교사라는 명찰을 내려놓고,
선교 후원금을 끊은 채 더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죽을 각오로 그분의 인도를 간구하는 것!
그들을 만난 것은 그 즈음이었다.
만남을 먼저 청한 것은 그쪽이었다.
느닷없는 약속을 앞두고, 나는 선교사 부부의 말을 경청하고
대접하면서 그들을 위로할 수 있기를 간구했다.
서먹한 인사와 어색한 산책을 지나 음식을 나누고 있었을 때,
갑작스런 화제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들의 선교지로 건너와서
주의 백성들을 도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부르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 16:6-10)
애쓰던 모든 시도들이 허락되지 않았던 이유를 몰라서
애만 태우던 날들이 순식간에 마침표를 찍고 달아났다.
모든 낭패의 비밀이 신속하게 풀렸던 것이다.
바울의 경우처럼, 그것은 상상도 못했던 곳으로
보냄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과 헤어진 후, 나는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저녁 묵상을 하기 위해 민수기 말씀을 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이 나를 와락 껴안았다.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
호밥이 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 우리와 동행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에게 행하리이다(민 10:20-32)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그 저녁, 오묘한 삼중창이 울려 퍼졌다.
그 길, 그 광야 길, 그 선교의 길을 함께 가자고
요청하던 모세와 선교사 부부의 목소리가
절묘한 하모니로 연주되었던 것이다.
연주가 끝날 무렵, 나는 이미 감동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가만히 들어온 원수의 저항도 이미 시작된 터였다.
‘그럼, 그동안 마련해 놓은 세간은 어떻게 할 건데?’
미니멀 라이프를 흠모는 하지만,
그것을 살아낼 능력이 없어서 한숨만 쉬는 나다.
덕분에 하나 둘 모은 세간이 그럭저럭하다.
저녁 묵상으로 한껏 고양된 직후,
세간을 아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원수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편히 잠들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밤새 뒤척이다 맞은 새벽,
아침 묵상을 위해 누가복음을 폈다.
말씀 속에서 회초리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이윽고 밤새 깐죽거리던 원수가
뒤통수를 문지르면서 줄행랑을 치는 모습이 보였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눅 17:30-33)
이제 곧 12학년이 되는 하영양에게는 못할 짓이었다.
내 년이면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 그녀에게
케냐와 미국에 이어,
또 다른 선교지로 학교를 옮겨야 한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은
퍽 미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눈치만 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결국, 지난 며칠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그녀에게 솔직하게 나누었다.
그리고 그녀의 처분(!)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은 의외였다.
다른 선교지로 옮겨가는 것이 괜찮다는 것이었다.
이야기 끝에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이런 게 그런 거구나.
십년 동안 사귀던 남자친구랑 헤어진 여자가
만난 지 일주일 된 남자와 결혼하는 거.”
여전히 내 삶의 목적은 선교가 아니다.
Communion with GOD!
그것을 위해 다시 낯선 선교지로 나아가기로 한다.
이 와중에 삶의 아이러니를 잠시 목격한다.
영혼이 그분께 깊이, 그리고 단단히 뿌리를 내릴수록
몸이 전 세계를 두루 다니게 된 것이다.
생각이 복잡하고, 결정에 있어서 우물쭈물하고,
초식 동물처럼 두려움이 많아 안전을 지향하는 치들이
낯설고 불안정한 곳으로 달려가려고 두 주먹을 불끈 쥔다.
마음은 이미 설레는 중이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Mar. 27. 2017.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