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지기들 2017. 3. 11. 03:04





산 밑의 제자


#1.

랍비 예수 외 3인에 끼고 싶지 않은 제자는 없었다. 

그러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벌써부터 선점한 터였다. 

밀려난 제자들은 상대적 박탈감이나 챙겨야했다. 

어제 산위에 오른 주님 외 3명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섭섭함과 서운함이 나머지들에게 노골적으로 들러붙기 시작했다. 

그들의 편안은 신속히 증발했다. 

그것이 휘발성 명사인 까닭이었다.


‘밤새 산 위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혹시 비밀스런 거래라도 오간 것은 아닐까? 

아니면 특별한 전략 회의라도? ’


산 밑의 아침은 초조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필요와 소원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몰려왔다. 


“귀신을 쫓아주세요, 병을 고쳐주세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사람들의 요청은 어려운 것이 없었다. 

일전에 주님은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모든 제자들에게 주셨다. 

이후 그들은 이인일조가 되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앓는 자들을 깨끗이 고쳐주었다.(눅 9:1-6) 

그렇게 산 밑의 제자들은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주님의 노련한 견습생들이었다. 


“제 외아들이 귀신 들려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제발 고쳐주십시오!”


아버지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서 

제자들 중 하나가 축사(逐邪)를 행했다. 

그러나 같잖다는 듯이 그를 비웃는 외아들이었다. 

당황한 제자는 곁에 있던 동료에게 도움을 청했다. 

별 수 없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제자들이 돌아가면서 

일제히 축사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말았다. 

귀추는 참담했다. 

비웃던 외아들은 급기야 그들을 대놓고 조롱하기 시작했다. 

산 밑은 실망감과 수군대는 소리로 어수선해졌다. 

‘그 때는 주님 없이도 역사가 일어났는데, 

왜 지금은 안 되는 거지?’ 

제자들은 당혹감에 쩔쩔 맸다.


수런거림이 멈춘 것은 예수께서 등장했을 때였다. 

군중은 부랴부랴 마중을 나섰다. 

예수 외 3명은 곧 무리에 둘러싸였다. 

절박한 외침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눅 9:38-40)


주님의 시선이 곧장 산 밑의 제자들을 향했다. 

홍역 꽃 같은 수치가 그들의 얼굴에 만발했다.



#2.

“당신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눅 9:20)


주님이 고대했던 일은 불과 얼마 전에 일어났다. 

그분의 정체가 밝혀지고 만 것이다. 

베드로의 올바른 고백으로 예수님은 몹시 흡족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예루살렘으로의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해야했던 것이다. 

그것은 놀면서 즐기는 패키지여행이 아니었다. 

반드시 십자가를 지나야 만 하는 필생의 노정이었다. 

신중해야할 필요는 충분히 다분했다. 

어느 때보다도 기도와 중보가 절실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산위로 올라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들의 중보 속에서 그분은 모세와 엘리야와 상의했다. 

위대한 선지자들은 입을 모아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눅 9:31) 말했다. 


최종 확인하는 작업을 마친 뒤, 

산 위에서 초막을 짓고 살겠다고 헛소리를 하는 3명을 이끌고 

산을 내려왔을 때, 그분은 이미 피로감에 찌들어 계셨다. 

하지만 산 밑에서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산더미 같은 설거지였다. 

변변찮은 제자들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해서 해결해야만 했던 것이다. 

거룩한 짜증이 그분의 목소리에 서리기 시작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눅 9:41)


외아들을 고쳐 아버지와 돌려보낸 후, 

예수께서는 앞으로의 구체적인 사역에 대해서 

모든 제자들에게 선포하셨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눅 9:44)


주님의 계산은 곧 섰다. 

제자들이 홀로 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이것은 자신이 그들과 항상 함께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하는 이유 하나가 추가되었다. 

보혜사 성령님을 그들에게 보내주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그 길을 받아들여야했던 것이다. 



#3.

능력과 권위를 부여 받은 후 

파송된 제자였던 적이 있었다. 

가는 곳 마다 묵상 모임을 만들어 

말씀을 강같이 흐르게 했던 것이다. 

목마른 자들은 그 강에서 해갈을 얻었고, 

그들 중 몇몇은 강의 물꼬를 새롭게 트는 일에 참여했다. 

묵상 모임의 인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정말, 정말 그랬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산 밑의 제자일 뿐이다. 

주님은 저 높은 곳에 계시고, 

나는 그분 외 3명에 속하지 못해 마냥 서운하기 만하다. 

섭섭한 자는 주님이 다시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초조하다. 

눈치가 없는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자, 

나는 능력 없음을 들키지 않을 재간이 없다. 

그들의 실망감은 비웃음과 조롱을 데려와 

내 귓전에 야유를 퍼붓는다. 

귓불에서 시작된 화끈거림이 얼굴 전체에 번진다. 

수치가 짙어갈수록 저 위에 계신 그분이 야속하기 만하다. 

이런 와중에도 본문은 깍듯하게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기어이 다시 함께 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고 야무지게 증거 한다. 


얼마 전 '재의 수요일'이 지났다. 

사순절이 출발선을 떠나 달음박질을 시작한 것이다. 

내 주님은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분이다. 

잠시 떨어져 잠깐 수치스러운 것은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한 약속이다. 

그러므로 산 밑의 제자는 

서운함과 불안일랑은 멀리 던져버려야 한다. 

마음 시린 날이면 틈틈이 비축해 놓은 

믿음, 소망, 사랑을 꺼내 입을 일이다. 

잠시 간의 헤어짐은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한 언약임을 기억하면서 

절찬리에 기다릴 일이다.




#Mar. 8. 2017.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