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발치 곁에 피는 꽃, 환대

창고지기들 2017. 3. 4. 02:15






발치 곁에 피는 꽃, 환대



#1.

손이 빠른 편이 아니다. 

뭐든 느긋하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는 법이 별로 없는 것은 

발(!) 빠르게 미리미리 시작하는 탓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그것이 뭐가 되었든 시간을 들여야 

제대로 된다는 신념이 생긴 것이다. 

거북이 같은 손을 들여다본다. 

집 안 일도, 책장을 넘기는 것도,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에도 급하지 않은 손이다. 

"똑똑똑!"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고 보니 한 여자가 빙긋 웃고 있다. 

손이 꽤 야물어 보이는 여자다.



#2.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눅 10:38)


그녀 마르다는 초대의 사람이었다. 

지나는 길손을 집안으로 불러들여 대접하는 것은 오래된 문화였다. 

전통에 따라 민첩한 손놀림으로 대접하는 일에 유능했던 그녀였다. 

덕분에 그녀의 평판은 자자해졌다. 

언제부터인가 손님을 치를 때마다 그녀의 어깨가 

1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씩 자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도, 심지어 마르다 자신조차도 

이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금번 손님은 매우 특별한 분이었다.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시는 랍비 예수였다.


인자가 일면 의사이기도 하다는 것은 

알 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마르다의 초대를 받기 직전에도 

인자는 한 차례 큰 수술을 집도하셨다(눅 10:25-37).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던 율법교사에게 

인자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셨다. 

그리고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라고 되물으셨다. 

율법교사의 자기중심성을 째고, 

타자중심성을 이식시키시기 위함이었다. 

내 입맛에 맞는 이웃을 고르는 대신에, 

강도 만난 자와 같이 도움이 절박한 사람의 이웃이 기꺼이 되라는 

서늘한 교훈으로 수술 부위는 봉합되었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대접하는 일에 

만전을 기하고 싶은 마르다였다. 

환영 인사는 짧았고, 

접대 준비는 그 보다는 훨씬 오래 지속되었다. 

융숭한 대접이라는 마르다의 목표를 위해 

예수님의 상태 메시지는 잠시 ‘방치’로 전환되어야 했다. 

분주할 대로 분주한 마르다의 손놀림 사이로 

문득, 일손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바쁨을 잠시 멈추며 마르다는 혼잣말을 했다. 

‘대체, 마리아는 뭐하는 거야?’ 



#3.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눅 10:39)


동생 마리아는 환대의 사람이었다. 

손님 본위로 정성껏 대접할 줄 알았다. 

상대를 귀히 여기는 자의 눈은 

뭐든 허투루 보는 법이 없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단번에 알아채는 것은 물론이다. 

마리아의 눈에 금번 손님은 가르치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 

그렇다면 환대를 위한 자리로 손님의 발치만한 곳도 없었다. 

마리아는 곧장 손님의 발치에 앉아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가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환대가 이토록 즐거운 일이라니!’

마리아는 그것을 마음 깊이 즐기는 중이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10:40)


환대의 사람이 태연하게 앉아 있는 꼴을 보자, 

초대의 사람은 얼큰하게 달아올랐다. 

분한 목청은 볼멘소리를 예수께 늘어놓기 시작했다. 

초대의 중심이 초대받은 자가 아니라 

초대한 자에게 있다고 은연중에 믿는 그녀였다. 

자기식대로 대접할 수 있도록 

마리아를 부리게 해달라는 요구가 당연하다는 듯 빗발쳤다. 

그것은 손님에게 주인의 방치 속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는 무례와 다름없었다. 

결국, 인자는 매스를 다시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율법교사 만큼이나 마르다를 몹시 아끼셨던 것이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1-42)


수술은 단 칼에 끝났다. 

인자는 말씀을 통해 자기중심적 초대를 냉큼 베어낸 후에, 

타자중심적 환대를 발라 꿰매셨다. 

마르다의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 

그러나 화로 인한 것은 더 이상 아니었다. 

반성과 깨달음이 마르다의 얼굴을 

자꾸만 부끄럽게 어루만졌던 것이다. 



#4. 

대접에는 대가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배울 만큼은 되었다. 

숱한 마르다를 만난 덕분이었다. 

대접에 상응하는 충분한 상찬(賞讚)을 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언짢은 마르다들이 기어이 볼멘소리를 하고야 마는 까닭이다. 

그런 자들의 대접을 받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자신을 찬양해달라고 초대하는 사람들이 점점 꺼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대접을 받는 일이 사역의 일부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접대를 잘 받는 메소드 연기라도 배워야 하는 걸까?’ 하는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인자도 쉽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을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눅 7:36, 44-46)


일전에 그분은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으셨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 끼리 먹고 마시는 

당시의 사회 문화적 풍토에 의하면, 

시몬의 초대는 퍽 선심을 쓴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그의 초대가 환대였던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신진 랍비 예수를 초대할 만큼 

진보적 성향을 갖춘 자신을 과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환대의 기본 패키지인 발 씻을 물, 입맞춤의 환영, 

머리에 바를 감람유를 예수께 제공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만큼 인자는 시몬에게 귀한 손님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환대의 기회는 뜻밖의 사람이 차지했다.

죄인으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한 여자였다. 

그녀는 다짜고짜 주님의 발치에 앉았다. 

그 후 주님의 발은 철저히 수동태가 되어 

눈물에 씻기고, 머리털에 닦이고, 입맞춤을 받았다. 

값비싼 향유 세례는 그 다음이었다. 

초대 받은 자들의 코끝에 하나둘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여자의 환대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의 위대한 선포가 흘러넘쳤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50) 


시몬은 더 이상 주인공일 수 없었다.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는 

환대받은 예수님과 환대한 여자 위에 고정되었다. 

그들 주변으로 향긋한 내음은 예쁘게만 번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분한 마음은 값비싼 향기를 즐길 수 없게 만들었다.

‘괜히 초대했어!’ 

어둠 속에서 시몬은 애꿎은 발만 동동 굴렀다. 



#5.

공교롭게도 마리아와 향유 자매(?!)가 

예수님을 환대했던 곳은 전부 그분의 발치였다. 

그들의 환대는 발치 곁에서 꽃을 피운 셈이다. 

자기중심적 초대에서 내려 타자중심적 환대로 갈아타려면 

역시나 몸을 심히 낮춰야하는 것이다.


난치병인 교만은 타자중심으로의 환승을 허락하는 법이 없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아니 된다고 막장스럽게 고집한다. 

그 비싸다는 자기부인을 먹고 죽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상번제로 매일 아침, 저녁 그분을 성실히 초대하고는 있지만, 

제대로 된 환대는 몇 번 없었다. 

매번 자기 멋대로 그분을 대접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자주 방치되셨고, 

오래 배고프셨으며, 내내 쓸쓸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할 때마다 거절하는 법이 없으신 주님이었다. 

마르다와 바리새인 시몬 같은 자의 초대라도 

매번 받아들이시는 그분의 성실하심 앞에서 

부끄러움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환대할 능력이 없는 자는 

매양 면목이 없어 처연하게 가슴만 칠뿐이다.



#6.

음식들이 소박하다. 

빵과 야채 스튜. 

식탁에 앉은 마르다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어린다. 

예수께서 활짝 핀 웃음을 그녀에게 건네신다. 

마르다도 애써 웃어 보인다. 

그분의 손이 빵을 찢어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내게 흡족히 건네신다. 

그리고 자신의 몫을 입속에 챙겨 넣으신다. 

오물오물 씹으시면서 말하신다.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여자가 향유 옥합을 손에 들고 있었다는 대목까지요.”


마리아가 빵을 스튜에 찍으면서 대답한다. 

껄껄 웃으시면서 예수께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두커니 앉아있던 마르다도 그분의 얘기에 젖어든다. 

한동안 손에 쥐고만 있던 빵을 먹기 시작한다. 

그분이 한층 더 목청을 높여 말씀하신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야채 스튜를 크게 한 입 한다. 

짜다. 

얼굴을 찌푸리자 마리아가 웃으며 물을 건넨다. 


“미안, 내가 요리에는 영 재능이 없거든.”


그녀가 옆에 앉은 내게 살짝 속삭인다. 

갑자기 마르다가 헛기침을 한다. 

마리아도 나도 눈치를 보면서 다시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한다. 

식탁은 어느 때보다 풍성하다. 

생명의 빵이 끝도 없이 쌓이는 중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Mar. 1. 2017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