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우리 안의 히틀러

창고지기들 2016. 5. 26. 14:53






막스 피카르트의 책, 「우리 안의 히틀러」를 읽고.



태초에 말씀이계셨다.

그분은 장차 태어날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셨다.

그것이 흑암과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신 이유였다.

질서의 자궁 속에서 세상이 출산되었다.

그를 받은 산파는 시간이었다.

산파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 맥락이라는 배냇저고리를 입혀주었다.

사람은 세상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났다.

그에 대한 창조주의 고집은 대단했다.

맥락 없이 그를 보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분의 눈에 불쌍하지 않은 자는 없었다.

긍휼이 맥락 속에서 창조되었던 것이다.

‘긍휼의 왕’이라는 그분의 별명은 지당했다.



타락한 인류는 보이지 않는 창조주를 무시했다.

보이지 않기는 시간도 마찬가지여서 내쫓김을 당했다.

반면, 눈에 확연한 공간은 철저한 편애의 대상이 되었다.

우상화였다.

내동댕이쳐진 시간은 캄캄한 곳에서 홀로 슬피 울었다.

시간의 눈물 속에서 세상은 결국 나치스의 약탈품이 되어버렸다.

맥락이 사려져버린 세상, 역사가 없는 세상, 과거에 대한 회상도

내면의 꾸준함도 없는 세상이 나치스의 세상이었다.

그것은 흡사 콜라주처럼 보였다.

전혀 상관도 없는 것들이 제멋대로 한데 섞여서는

카오스를 여기저기 지렸다.

태초의 흑암과 혼돈과 비슷해 보일 법은 하지만 전혀 다른 종류였다.

그것은 재생 불가능한 파편들이자, 악의 쓰레기 더미였다.

그 속에서 창조주 흉내를 낸 자가 있었다.

히틀러였다.



맥락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꾸준함,

끈기, 내면의 지속성을 잃어버렸다.

혼란 속에서 그들의 내면은 끝없이 불안했고,

그래서 자기 존재를 확인해줄 무언가를 갈구했다.

사이비 창조주 히틀러가 등장한 것은 그 때였다.

그는 말씀이 아니라 구호로 악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나치스를 창조했다.

‘하이, 히틀러!’라는 외마디,

비명, 기호, 명령, 주술로 사람들을 사로잡고는

공장에서 제조하는 상품처럼 악을 근면히 생산해냈다.

그러나 나치스의 세상은 불과 몇 년 만에 끝장이 나고 말았다.

진짜 창조주의 간섭으로

가짜는 악의 최후를 보여주는 전례(前例)로 못 박혔던 것이다.



맥락 없는 세상이 히틀러를 교훈으로 받을 리 만무하다.

그것은 기억 상실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면의 꾸준함과 지속성을 추구하는 개별자들은 있다.

그러니 어쨌든 어느 누군가는 애써 기억해야 한다.

인류는 그 누구도 나치스의 홀로코스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또 다른 히틀러의 출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내면의 진정한 연속성을 만들어주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한 인간의 과거를, 그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하나의 내적인 통일로 결집시켜준다.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사랑할 때,

과거를 사랑의 따뜻함으로 품어 안을 때,

인간은 자신의 과거를 정리하고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연속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신이 단순히 연속적인 것을 넘어 진정으로 영원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신은 모든 사물과 인간을 가장 위대한 사랑으로 품어 안기 때문이다.

-본서 중에서



지금도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선배 신학자들이 한 짓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맥락을 무시한 채

한 두 구절을 문제 삼아 상대방의 신학 사상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상대를 쓰러트리려는 욕망이

맥락을 무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신을 위한답시고 했던 그들의 행위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신에 대한 학문을 할 자격이 없음을,

나아가 그들이 정녕 신의 자녀가 아님을 명백히 하는 것이었다.



내 삶은 말씀의 맥락에 나를 꾸준히 엮어가는 것이다.

그와는 동전의 양면인 일이 지체들을 맥락 속에서 보는 것이다.

불쌍히 여기면서 그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맥락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훨씬 더 많다.

사랑이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더러는 강퍅하게도 맥락을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딴전을 벌이기도 한다.

맥락 속에서 이해받길 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타인의 맥락을 무시하는 악함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는 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일 진대

회개할 일이 이만저만하지 않다.



고위층이든 신분이 낮은 사람이든, 모두 공동체의 성원이다.

최고위층은 공동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최고위층의 기반이다.

거기에는 신분이 낮은 자의 몫도 분명히 있다.

공동체와의 연관을 늘 유념하는 최고위층이라면 언제나 절제할 줄 안다.

공동체와의 연관을 무시하는 최고위층은 늘 위만 보고 달린다.

자신이 최고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이런 최고위층은 무절제하다.

-본서 중에서



공동체는 전체성을 각별히 유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너 없이는 나도 없고,

너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라는 전체성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이익 집단일 뿐이다.

금수와 다름이 없는.



그러나 인간 정신의 탁월함은,

그가 어떤 심리적 기질을 용인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는 데 있지 않을까.

인간은 심리적 기질 그 이상이다.

인간은 자신의 심리적 기질을 다스린다.

또 인간은 자신이 어떤 심리 기질을 가질지를 선택할 수도 있다.

-본서 중에서



정신이 상실된 결과,

섹스는 더 이상 인간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섹스는 당연한 것이며, 어디에나 있는 것이고,

순간에 집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섹스의 진정한 신비는,

바로 섹스가 정신의 짝을 이루기는 것이기 때문에 생겨난다.

섹스가 정신과 대립하여 보완하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경우,

섹스의 신비는 사라진다.

-본서 중에서



영혼엔 익숙한 반면 정신은 낯설기만 하다.

퍽 의도적으로 그것으로 홀대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것에서 오만한 남성성의 체취가 느껴지니 말이다.

이 또한 오래 묵은 편견일 것이다.

‘정신’이라는 단어에 주목을 하게 해주었으니,

저자에게 여간 감사한 게 아니다.

이러저러한 일들로 정신이 없는 요즘이다.

빨간 경고등이 켜진 셈이다.

맥락이 훼손되기 전에 다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영원한 것, 불변의 것에 대한 관심을 잃은 사람들 앞에는

치고 나갈 공간만이 남아 있었다.

조그만 빈틈만 보이면 차지하려고 들었다.

팽창은 이렇게 일어났다.

말하자면 시간은 공간으로 환산된 셈이었다.

-본서 중에서



공간의 아이는 빈틈을 용납하지 않는다.

빼곡하게 채우지 않을 재간이 없는 것이다.

나 역시 공간의 아이일 뿐이었다.

죽은 공간을 찾아내어 살리는 것이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공간의 아이만은 아니다.

은혜를 따라 비로소 여백을 알아보게 된 것이다.

여백이란 공간 안에 시간을 들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본능을 거스를 수 없고서는

여백을 즐거워 할 수 없는 것이다.

여백을 넓혀가는 성숙이 내 안에 자꾸만 고여 들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을 수 없는 날들이다.





#May. 18. 2016.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