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지기들 2016. 3. 31. 21:29





나쓰메 소세키의 책, 「마음」을 읽고.



내가 살아온 역사이며

그 누구도 대신 말해줄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경험인 과거를

한 점의 거짓도 없이 써 내려갔네.

그 덕분에 인간을 알아가는 데 있어

자네와 다른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의 수고는 헛되지 않을 것이네.

-선생님의 유서, 본서 중에서



소설 속 화자는 두 명이다. 나와 선생님.

내가 화자일 때는 관찰자이자 회상가로

선생님과의 만남을 더듬는다.

그리고 선생님이 화자일 때는

서간문으로 자기 일대기를 고백한다.

그런데 나의 관찰 대상은 비단 선생님만은 아니다.

아버지 역시 나의 관찰 대상이 된다.

선생님과 아버지는 나에게는 비슷한 존재다.

그들은 공히 나의 아버지들인 것이다.

아버지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육신의 아버지라면,

선생님은 자의로 택한 정신의 아버지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죽음을 맞이한다.

아버지가 병으로 인한 자연사를 목전에 두었을 때,

선생님은 자결을 감행했던 것이다.



아버지와 선생님은 자신의 죽음을

각각 메이지 천황과 노기 장군의 것과 연결시켰다.

아버지는 메이지 천황의 자연사와 자신의 것을 엮었고,

선생님은 노기 장군의 자살과 자신의 것을 묶었다.

이 두 아버지들을 통해 아직 청년인 나는

인생의 그러함을 배우는 중이었다.

아버지를 통해서는 몸의 생로병사를,

선생님을 통해서는 마음의 생로병사를

아프게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악인이라고 낙인을 찍을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평상시에는 모두 선한 사람들이란 말일세.

적어도 보통은 되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악인으로 돌변하니까 무섭다는 거야.

그러니 방심해서는 안 돼.”

-선생님의 말, 본서 중에서



선생님은 나에게 선택된 아버지다.

그런데 선생님과 나는

20대 초중반의 같은 또래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선생님의 마음이 청년 시절에 고착되어,

그 후로 한 뼘도 자라지 않았던 까닭이다.

어쩌면 그것은 정신적 외상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믿었던 숙부의 배신과 절친한 K의 자살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그의 마음이

성장하길 거부했던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선생님이 해왔던 일이라곤

지속적으로 아픈 상처에 손을 대고 또 대는 것뿐이었다.

덕분에 상처는 아물 수 없었고, 도리어 크게 덧나서

결국 그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사람이란 무릎을 꿇은 기억이 있으면

훗날 상대의 머리 위에 다리를 올려놓으려고 들기 마련이야.

나는 그런 수모를 겪느니

차라리 지금 받는 존경을 사양하고 싶네.

지금보다 더 비참한 미래를 감내하느니

차라리 외로운 현재를 견디는 게 나아.

우리가 태어난 시대는 자유와 자립

그리고 자아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쓰디쓴 외로움을 견뎌야 하지.”

-선생님의 말, 본서 중에서



어찌 보면 살아간다는 것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벗는 연속 동작이라 할 수 있다.

상처를 입고 벗어내면서 인간은 성숙해진다.

성숙하다는 것은 인간과 인생의 역설과 아이러니를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이다.

인간은 단순히 선하냐? 악하냐? 로

구분 지을 수 없는 신묘한 존재고,

인생 역시 오묘하긴 마찬가지다.



숙부에게 기만당한 뒤

나는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했지.

하지만 위선이나 기만은 타인이 행하는 것이지

나 자신은 흠이 없다고 여겼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는 당당하다는 신념이 마음 어딘가에 있었지.

그런데 그 신념이 K로 인해 보기 좋게 깨어지고

나도 숙부와 똑같은 인간임을 자각하게 된 순간

나는 휘청거렸네.

사람에게 실망했던 내가 나 자신에게 실망하자

세상 어디로든 나갈 수가 없었네.

-선생님의 유서, 본서 중에서



숙부에게 기만당한 뒤 선생님은 자기연민에 빠졌다.

자기연민이란 자신이 더 나은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인데,

현실이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는 자기기만이다.

그런데 그의 자기연민은 K와의 관계 속에서 깨져버렸다.

그러자 자기혐오가 자기연민의 자리를 빼앗았다.

그러나 자기연민과 자기혐오는 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자기연민과 자기혐오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린 채

선생님은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았다.

사람(人)됨의 그러함,

곧 서로 기대어 같이 살 수밖에 없음을

옳게 실천하지 못했던 탓에

자살이라는 그의 마침표는 어색할 수 없었다.



선생님도 사모님도 지금처럼 가만히 있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죽음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아버지를

고향 집에 두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나는 인간이 얼마나 덧없는 존재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다시금 허망함을 느꼈다.

-나의 말, 본서 중에서



아버지의 임종을 곁에서 지키는

화자의 무기력함이 낯설지 않다.

나 역시 같은 경험을 했던 것이다.

무력(無力)한 느낌이 좋을 리 없다.

그것은 쉽사리 인생의 덧없음, 존재의 가벼움을 소환하며

낭만적인(?) 신세타령을 하게 한다.

하지만 그 보다는 외면할 수 없는 인간의 현실은

똑바로 응시하는 편이 낫다.

용기를 갖고 무력한 자신과 무자비한 현실을

똑바로 노려볼 때, 비로소 얻게 되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좁은 한계 안에 놓여있는 문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라는 것이다.   



인격의 중심에 마음이 있다.

그것은 육체와 영혼이 함께 춤추며 뛰노는 광장이다.

그래서 끝도 없이 광활하며,

하나로 정의내릴 수 없는 다채로운 빛을 뿜어낸다.

실망의 빛은 그것의 수많은 빛깔들 중 하나다.

재밌는 것은 실망 때문에

그것이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실망은 마음이 자신이나

다른 이들의 기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그것은 자유롭다. 무엇도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도 예외는 아니다.

그분조차도 사람의 마음을 어쩌지 못하시는 것이다.

그만큼 마음은 독특하고도 귀하다.



‘나(마음)를 비추는 거울’, 그것은 성경의 다른 이름이다.

수 십 년 동안 성경과 뒤엉켜 살아온 탓에,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느새 내 일들 중 하나가 되었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직업 탓이었을까?

일본 국민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능금의 달콤함을 기대했는데,

정작 베어 문 것은 시큼한 풋 사과였던 것이다.

청년기의 치기를

안쓰럽게 느끼는 나이가 되어 버린 탓도 있었으리라.




#Mar. 7. 2016.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