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기적 비범한 기적
평범한 기적, 비범한 기적
1.
사방이 캄캄했다.
진한 먹색은 하늘과 바다를 꼼꼼히 칠한 후 경계마저 지워버렸다.
‘한낮에 우리가 했던 일은 뭘까?’
족히 수천은 넘는 사람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느라 고생이었던 어깨와 팔을 주무르면서
그들은 상념에 잠겼다.
바람 끝이 처음 승선했을 때보다 퍽 거칠어졌다.
까칠한 수염에 놀란 아이가 아빠를 밀쳐내듯이
파도는 세찬 바람을 밀어내느라 점점 더 거세져만 갔다.
제자들은 혹시라도 배가 뒤집힐까 안간힘을 썼다.
‘대체 주님은 우리만 배에 태워 보내시고는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는 거야?’
“유, 유, 유, 유령이다!”
느닷없이 요한이 소리를 질렀다.
요한의 손가락 끝에 모든 시선들이 뛰어들었다.
놀라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심장 박동이 일렁이는 파도를 어지럽게 난타하기 시작했다.
“안심해라! 두려워하지 마라.”(마태복음 14:27)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 목자의 음성이었다.
양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물위를 걸어서 다가오는 존재를 응시했다.
정말 주님이었다.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와 함께
혹시 바다 괴물인 라합에게 홀려
단체로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젖어들었다.
한동안 단단히 막혀있던 말문을 열수 있는 자는 없었다.
침묵이 맴돌았다.
“주여, 정말 주님이시라면
저에게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소서.”(마태복음 14:28)
드디어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입을 열었다.
“오너라.”(마태복음 14:29)
바다 쪽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베드로는 배에서 뛰어내렸다.
재빠른 동작에는 겁이 없었다.
그는 마치 처음 걸음마를 하는 아이처럼
서투르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배는 믿을 수 없는 표정들로 만선이 되었다.
전진하는 그의 눈에는 주님뿐이었다.
그리고 다가갈수록 주님임이 더욱 확실해 졌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의식되었다.
물 한 가운데를 걷고 있는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난폭한 바람이 그의 눈을 덮친 것은 그 때였다.
두 눈을 빼앗긴 삼손처럼
그는 힘없이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주님, 살려주십시오.”(마태복음 14:30)
질끈 눈을 감은 채 베드로가 소리쳤다.
짠맛이 느껴졌다.
짠맛의 정체가 바닷물인지, 눈물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던 손에 뭔가 단단한 것이 잡혔다.
그것을 냉큼 붙잡았을 때, 그분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느냐?”(마태복음 14:31)
갑판이 물이 뚝뚝 떨어졌다.
베드로는 흠뻑 젖어 있었다.
주님이 그와 함께 배에 오르자
거친 바람과 사나운 파도는 잦아들기 시작했다.
제자들은 압도되었다.
동백꽃 같은 무릎이 하나 둘 주님 앞에 통째로 떨어졌다.
경의와 찬탄에 휩싸인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소리 높여 찬양했다.
“주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태복음 14:33)
2.
제자들을 압도시킨 것은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기적이었다.
흔히 기적은 자연 법칙을 일시적으로 어기고 정지시키는
외적인 힘의 개입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다.
그래서 기적 이후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찬양했던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는 기적을 통해서 경험되곤 한다.
자연, 몸, 시간, 이 땅의 실재에 대한
초자연적 사건을 통해서 그분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의미에서의 기적일 뿐이다.
비범한 기적은 따로 있다.
‘기적은 물 위를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기적은 땅 위를 걷는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기적은 자연 법칙 안에 이미 충만하다.
밤새 자고 아침이면 눈을 뜨는 것,
새벽마다 새들이 어김없이 지저귀는 것, 매일 태양이 떠오르는 것,
쑤쿠마가 자라는 것처럼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것 안에 기적은 있다.
그것이 비범한 기적이다.
날마다 그것을 보고 놀라워하고, 압도당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물론, 비범한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
주목하여 응시하는 것, 지금에 유념하는 것,
그리고 무엇에 대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안에서 기뻐하는 것을 일상에서 훈련하는 동시에 향유해야 한다.
이는 퍽 단순해 보이나, 단언컨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감정도 지식도 말라버린 나의 현실에 남은 것은 의지뿐이다.
부드럽고 풍부하게 하는 물과 거름이 고갈된 땅은 척박하기만 하다.
있는 의지를 모조리 짜내어 필사적으로 기경해도,
변변한 새싹 하나 얻기에도 벅차다.
그런 세상에서 평범한 기적을 구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창조주께 손수 만드신 법칙을 깨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랑하는 자가 할 일이 아니다.
도리어 법칙 안에 숨겨져 있는
비범한 기적을 보려고 애쓰는 편이 옳다.
의지의 세계는 척박하다.
평범한 기적을 아쉬워하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남은 의지로 해야 할 일은 그것을 마중물 삼아
비범한 기적을 볼 수 있는 눈들을 퍼 올리는 것이다.
만물 안에 충만한 그분의 기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비옥함은 마르고 거친 땅 속에서 움트는 법이니까.
#Feb. 15. 2016.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