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빈자리
도널드 밀러의 책, 「아버지의 빈자리」를 읽고.
이 책은 독자를 노골적으로 제한한다.
저자가 아버지의 부재로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 매는
자신과 같은 남성들을 주 독자층으로 한정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책을 읽는 내내 흡사 옆방에서 들려오는
남자들의 은밀한 수다를 엿듣는 느낌이 들었다.
엿보고, 엿듣는 일은 일정 정도의 재미를 보장하지만,
별스럽지 않은 재미이기에 허전함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남자의 수다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그의 얘기는 여자인 내 것과는 분명히 달랐지만,
전혀 상관없는 얘기도 아니었다.
어쨌든 아버지는 나와 같은 여자에게도 중요하며,
심지어 내 아버지의 자리는 현재 비어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밀러를 처음 만난 것은 십여 년 전
「재즈처럼 하나님은」을 통해서였다.
갈수록 기억이 너덜너덜해지고 있는 탓에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다.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오시는 그분에 대한 이미지와
저자의 솔직함이 고작이다.
그런데 저자 특유의 솔직함과 겸손함은 여전했다.
그것이 독서를 유쾌하게 만들었고, 가끔은 크게 웃게 했으며,
더러는 눈물도 흘리게 했다.
책 전반을 통해서 저자는 자기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늘어놓았다.
불안함, 열등감, 자기 연민, 불평, 권위에 대한 반항심,
성급한 맞대응, 어리석은 선택과 결정, 책임감 결여, 게으름….
저자는 부정적 요소들의 지배를 받았던 지난날들을 회고하면서,
그것이 아버지의 빈자리,
곧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상처로 인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후로 그는 아버지의 부재가 다음과 같이 사회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과 마주치게 되었다.
재소자의 85퍼센트는 아버지 없이 자란 사람들이다.
개인적인 경험과 사회적인 필요가 부딪히면서
저자의 콜링(calling)이 성사되었다.
결국, 저자는 아버지의 부재를 어떻게 극복해나갔는지를
구도자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로 인하여 불안 속에서
나쁜 선택과 결정을 통해 자기 인생을 망쳐가고 있는
어린 남성들에게 파더링(fathering)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파더링의 과정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여정과 다를 수 없다.
독자들이 나와 비슷하다면,
자기 연민에 빠지는 기분이 꽤 괜찮기 때문에
그러는 경우도 가끔 있다.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한번 생각해 보라.
내가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현재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얼마나 교만한 생각인지.…
불평은 자기 연민과 별 다를 바가 없다.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자기에게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 얼마나 교만한가? 불평은 그만하고,
차에서 내려 타이어를 갈고 가던 길을 계속 가야 한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불평은 자기 연민의 일종이다.
-본서 중에서
독서 중에 욕실의 하수구가 막혀 물이 역류했다.
성가심은 불평을 끄집어내는 데는 민첩한 편인지라,
입술은 이미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때마침 저자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잔뜩 골이 난 입술을 달래면서 생각했다.
나는 얼마나 교만한 사람인지!
교만이라는 나무의 수많은 가지들 중 하나가
자기 연민과 불평이라는 저자의 말을 곱씹으면서
하수구가 뚫리길 기다렸다.
배관공의 손길이 닿자 하수구는 곧 원활해졌다.
나는 딜라드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배우려고 책을 읽는 것도,
성공하려고 배우는 것도 아님을 자각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느끼셨던
즐거움을 경험하려고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그분의 작품을 발견한다.
-본서 중에서
내게 책을 읽는 것은 일종의 예배다.
독서를 통해서 그분과 깊이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을 알아가고, 그분이 창조하신 것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때마다 나는 전율한다.
그래서 책을 읽고 배우는 일을 중단할 수가 없다.
예배는 결코 멈출 수 없는 인간의 행위이기에 말이다.
목사님은 용서란 다른 사람이 떠넘긴 짐을
그 사람의 책임을 묻지 않고 견디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
용서해도 고통은 남는 법이다.
우리가 상대방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자신이 저지른 일의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고
그를 용서한 것이다.
-본서 중에서
용서가 과정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견디는 과정이라는 저자의 말은 새삼스러웠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용서를 단번에 끝내시는 줄로만 알았다.
어쨌든 그분은 전능하시니 말이다.
그런데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나님은 용서하시기 위해서 계속해서 견디고 계시는 것이었다.
결국, 그분이 계신 곳은 고통의 한복판인 셈이다.
용서를 할 때마다 괴로운 이유는
그것이 상대방의 대가를 자신이 대신 치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견디고, 대신 감당하는 나를 견디면서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가?
그러니 용서를 하려하면, 가랑이가 찢어지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거운 역기를 들다가 근육이 손상되면,
근육이 자신을 보수하고 크기를 늘려
다음번엔 역기를 용이하게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처럼,
용서의 근육 또한 그분에 의해서 보수되고 커질 것을 믿는다.
그러니 찢어지고 손상되는 일을 더는 두려워하지 말일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읽고 보니,
아들 하진군에게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다.
그와 그의 아버지를 축복하지 않을 수 없다.
아들에게 소속감을 통한 안정감을 주며,
남성성의 고양을 위해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관심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축복한다.
그렇게 어린 남자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진짜 남자,
성숙한 남자가 되어갈 것이다.
어미조차 반할 정도로 진짜 멋진 사나이가!
#Jan. 15. 2016.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