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기
보나벤투라의 책, 「하느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기」를 읽고.
스콜라 전통의 세력은 대단하다.
고등학교 윤리시간에서 조차
토마스 아퀴나스를 배웠으니 말이다.
중세의 철학자요, 신학자는 아퀴나스뿐이었다.
당시로선 암기할 분량이 대폭 줄어들어
다행한 일이었는지 모르나,
같은 시대를 풍미했던 다른 전통 배울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것이 지금으로선 퍽 안타깝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13세기를 살았던
한 사람이 바로 보나벤투라다.
아퀴나스가 철학적 신학을 추구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프란체스코로부터 발원된 수도원에 뿌리를 두고
영성 신학을 발전시켰다.
보나벤투라는 거룩한 읽기인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통해
성경을 문자적, 풍유적으로 다양하게 해석하는 한편,
교회의 위대한 성인들의 글을 통해
성경을 다양하게 해석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자연과 인간의 경험을 텍스트로 간주하여
그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읽고자 했던 신학자였다.
「하느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기」의 전체 얼개는
은유와 상징으로 짜여있다.
즉, 세라핌(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형상에
여섯 날개가 달린 가장 높은 등급의 천사)과
케루빔(언약궤의 시은좌를 덮고 있는 두 날개를 가진 천사),
그리고 성전(뜰, 성소, 지성소)을 복합적으로 엮어서
인간과 하나님의 연합 과정을 7단계로 이야기하고 있다.
상징과 은유라는 문학적인 구조에 비해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퍽 철학적이고도 신학적이다.
그래서 독서가 수월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구조와 실제 언어 사이의
온도 차이가 만들어내는 묘한 느낌이 썩 나쁘지 않다.
오히려 기묘한 쾌락을 주는 구석이 더러 있기 까지 하다.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며, 입술을 벌리고, 마음을 열어(잠언 22:17)
모든 피조물 속에서 그대의 하느님을 보고, 듣고, 찬미하고, 섬기고,
사랑하고, 공경하며 영광을 드려 땅 전체가
그대에게 대항하여 일어나지 않게 하라!
왜냐하면 우주는 말하자면 “미친 자들과 싸울 것”이지만 반면에
지혜로운 자에게는 찬미 동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서 중에서
저자에 따르면 영혼이 하느님께 이르기 위해서는
모두 7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 단계는 자연을 관상함으로써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요,
두 번째는 자연을 인식하는 감각을 관상함으로써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요,
세 번째는 감각을 질서 있게 처리하는 인간의 이성을 관상함으로써 나아가는 것이요,
네 번째는 하느님의 DNA가 박혀있는 영혼을 관상함으로써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요,
다섯 번째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하느님의 이름을 관상함으로써 나아가는 것이요,
여섯 번째는 선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을 관상함으로써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요,
마지막 일곱 번째는 하느님과 마침내 연합하여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관상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것은 아름답고 어떻게 해서든지 기쁨이 일어나게 한다.
아름다움과 기쁨은 결코 상칭(相稱)이 없지 않다.
이것은 첫째로 수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만물의 근저에는 수가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수(數)는 창조주의 뜻 안에서는 가장 탁원한 원형이다.”
-본서 중에서
개인적으로 이 책의 신선함은 책이 쓰인 시점에 있었다.
이 책은 신학, 철학, 수학, 과학이 완전히 분리되기 전에 쓰였다.
그래서 저자는 신학으로 철학을
그리고 철학으로 과학과 수학을 모두 껴안고 아울렀다.
그는 3단계 이성을 관상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과정에서
철학과 과학을 이야기하는데,
철학을 자연론, 이성론, 도덕론으로 나누었으며,
수학과 과학(물리학)은 자연론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자연론은 형이상학, 수학, 물리학으로 나뉠 수 있으며,
형이상학은 성부를, 수학은 성자를,
그리고 물리학은 성령에게 이르게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수학을 통해 신께 나아갈 수 있다는 신학은
비단 인도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학창시절 수학과 과학 성적이
그만그만했던 이유로 신학의 부재 탓하며 피식 웃었다.
보나벤투라를 학창시절에 만났더라면
수학 성적이 훨씬 좋았을 지도 모른다.
나아가 화학이나 지구과학에 비해
터무니없이 싫어했던 물리 역시
좀 더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ㅋ~
그러나 만일 그대가 이런 현상들(하나님과의 연합하는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고자 하면 학문이 아니라 은총에 물어보라.
이렇듯이 지성이 아니라 열망에,
영적 독서에 전념하기보다는 탄식 기도에,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묻고,
밝음에 묻지 말고 어둠에, 빛에 묻지 말고 불에 물어보라.
그 불은 완전하게 타올라서 신비적 도유와
불타는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 안으로 변형시킨다.
이 불이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풀무는 예루살렘이다.
-본서 중에서
얼마 전부터 마음속에 '사람이 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겼다.
회의적이었던 이유는 사람과 밝음과 빛에 물었던 까닭일지도 모른다.
그분, 어둠, 그리고 불에게 묻는다면 다른 답을 얻을지도 모른다.
성령께서 종종 기름과 불로 은유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변하는 일의 고통을 감안하자
비로소 그것의 지극한 어려움이 파악된다.
그렇다고 불가능할 수도 없는!
#Nov. 9. 2015.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