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의 한국미술사강의3
유홍준의 책,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3」을 읽고.
제일 큰 이유는 부채감(負債感)이었다.
서양미술에 대해서는
꽤 많은 시간과 돈(책값)을 들였던 반면,
한국미술에게는 인색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국미술은
주인집 자녀의 상에서 떨어진 빵부스러기와 같아서
학창시절 국사와 미술 교과서와
미디어를 통해 접했던 상식 수준의 것이 전부였다.
빚진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비록 고국을 떠나 방랑은 하고 있지만,
어쨌든 나도 한국 사람인 것이다.
회화란 아름다움을 적극 표현한
본격적인 예술 작품일 뿐만 아니라
화가의 작가의식이 명확하게 들어 있고,
필연적으로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문화사 전체의 시각에서도
회화사는 각별한 위치를 갖는다.
-본서 중에서
한반도에 그림다운 그림이
비로소 화사하게 만개했던 시절은 조선시대다.
조선은 성리학의 토대 위에 신분제도로 사층 건물을 세웠고,
입주자들에게 학문과 도덕 숭상을 주입했다.
네 개 층의 입주자들은 각각 궁중 문화, 양반 문화,
서민 문화, 불교문화를 성실하게 발달시켰다.
특별히 미술과 관련해서는 도화서 화원(직업적 화가)과
사대부 문인화가(취미로 그리는 화가)가
실용화와 감상화라는 양대 산맥을 일구어 놓았다.
그림은 시대를 타고 일어난 사회적 요구와 수요와 맞물려
양적인 팽창과 함께 질적인 성장을 꾸준히 보이다가
마침내 18세기 영조와 정조 시대에 절정에 오른다.
이후 조선 회화는 반락과 반등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근대 회화에게 바통을 넘겨준다.
책은 오백 년 조선 미술사를
500페이지에 촘촘하게 담고 있었다.
시간에 따라 수많은 화가들과 작품들이
숨 가쁘게 등장했다 정처 없이 사라지길 반복했다.
초반부터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썩 나쁘지는 않았다.
몇 가지 이유로 피로감이 윤색되었던 까닭이었다.
서양의 풍경화는
인류 역사에서 비교적 후반부에 등장한다.
17세기 자연주의 사상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출현한 것이다.
풍경이 각광받는 주인공으로 캐스팅되기 까지는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긴 기다림 끝에 기회는 찾아왔다.
19세기에 이르러 윌리엄 터너나
존 컨스터블과 같은 화가들에 의해서
풍경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로 자리매김을 했고,
나아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과 함께
새로운 전기(轉機)를 써나갔다.
동양의 풍경화도 서양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나,
시기적으로 서양 보다
1천 년 이상 앞선다는 것이 상이하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공히 그림의 일차적 소재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풍경화와 관련된 동, 서양의 미술사가
꽤 재미있게 다가온다.
프랙털 즉, 풍경화의 역사와
개인적인 시각예술에 대한 관심의 궤적이
무척 흡사하기 때문이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내게 풍경은
야곱의 레아와 같은 것이었다.
나를 매혹시켰던 라헬은 인물, 음식,
꽃, 소품과 같은 구체적인 대상들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아마도 나이 탓일까?)
자주 배경에 눈길이 머무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게다가 공간을 꼼꼼히 채우려는 열정이
느닷없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말로만 지껄이던 여백의 묘미를
비로소 느낄 수 있게 된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구멍이 뚫린 듯
듬성듬성 여백을 남기는 조선의 그림이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은 풍경 중심의 소상팔경도와
산수인물화인 절파화풍의 그림을 다량 보유하고 있었다.
그 예쁜 것들을 보는 재미가
피로감을 살짝 압도하곤 했다.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배웠던 단원 김홍도는
재기 넘치는 풍속 화가일 뿐이었다.
이것은 사지선다형 시험문제를 위한
과도한 축소주의의 병폐다.
단원은 풍속 화가로 축소될 수 없는
조선 최고의 화원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샛강들을 하나로 모은 거대한 강이자,
좀처럼 오르기 힘든 험준한 산봉우리다.
때론 섬세하면서도 정치하고,
때론 호방하고도 거친 필치를 구사할 줄 알았기에
그는 모든 장르를 넘나들며 명작들을 남겼다.
이 책을 통해서 그를 바로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혜가 아닐 수 없다.
호감이 가는 화가들이 수두룩했다.
양송당 김지, 남리 김두량, 현재 심사정,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 우봉 조희룡,
북산 김수철이 그들이다.
그들의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코를 박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의 도판이 작은 까닭이었다.
겸손히 고개를 숙여
그들의 그림을 게걸스럽게 삼킬 때마다
요상한 기운이 목덜미로부터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곤 했다.
그럴 때면
이러다 혹시 스테고사우르스로 변신하는 건 아닐까? 하는
동심이 느껴져 즐겁기도 했다.
보는 재미를 주는 책이었다.
덕분에 점점 침침해져 가는 눈이
한동안 호사를 누렸다.
책을 덮고 나자 부채감이 줄어들었다.
대신에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떨어졌다.
얼마를 묻어놓아야
싹이 날 지 알 수 없는 마음이.
#Sep. 25. 2015.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