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을 위한 각고
긍휼을 위한 각고
현실의 주소는 흉가나 다름없었다.
꼰대질이 꿰차고 있었으니
너그러움이 발붙일 곳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강요(꼰대질)하고 싶은 욕구는
자고 일어나면 부지런히 알을 깠고,
머지않아 노파심이라는 그럴 듯한 옷을 걸치고는
하나 둘 입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엔트로피가 지혜를 손아귀에 넣는 순간이었다.
중년의 나이에 지혜의 쇠락을 목도하는 것은
몹시 언짢고 두려운 일이다.
꼰대질의 핵심은 이것이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그러니 무조건 내 말을 따르라.’
터무니없는 자기 확신과 굽힐 줄 모르는 완고함은
정확히 자기중심을 가리킨다.
그것이 전조작기의 특징일진대,
그렇다면 유아기로 회춘했다고 축하라도 해야 할까?
길거리, 광장, 길목, 성문 어귀 등
어디에나 있는 지혜는 동양의 현자를 통해서도 소리친다.
賢者肯於人 愚者謗於人(현자긍어인 우자방어인).
현명한 사람은 남을 긍정하고,
미련한 사람은 남을 비방한다.
안타까운 일은 어리석은 자의 수가
슬기로운 자를 압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우쭐대던 선민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여호와)가 내(에스겔)게 이르시되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죄악이 심히 중하여
그 땅에 피가 가득하며 그 성읍에 불법이 찼나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여호와께서 보지 아니하신다 함이라
(에스겔 9:9)
언제까지나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죄악 때문이었다.
여호와와 그분의 백성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죄악은
그들의 사이를 집요하게 벌려놓았다.
결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죄악과 파트너가 되기 위해 여호와를 버렸다.
거절당한 여호와는 오래도록 소외되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을 포기하는 것은
그분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꾸준히 선지자를 보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단하기는 백성들도 못지않았다.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는 번번이 무시와 조롱을 당했다.
이 와중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적반하장과 합리화의 수장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 멸망의 이유를 여호와께 돌렸다.
그들의 주둥아리는 어떻게든 구제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피눈물을 쏟았던 여호와를
오히려 자기 백성을 버린 돼먹지 못한 신으로 전락시켰다.
오래 참아왔던 여호와의 사랑이 분노의 땔감이 되자
더 이상의 긍휼이 그들에게 허락될 수 없었다.
그들은 한 푼도 깍지 못한 채
죄 값을 고스란히 치러야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갚으리라 하시더라
(에스겔 9:10)
“수박 한 쪽 먹어봐, 시원하고 맛있어!”
“아빠가 그렇게 원한다면 하나 먹어줄게.”
주객전도는 가끔씩 우리 집에도 방문한다.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은 자기가 굳이 손님으로 있어주는 것은
다 주인을 위해서라고 큰 소리를 친다.
가끔 그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곤 한다.
분명 자기 유익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상대를 위한 것인 양
너스레를 떠는 자의 입을 목격할 때가 있다.
그런 손님은 재빨리 내보내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선뜻 그럴 수 없는 이유는 늘 충분하다.
나 또한 주객전도 협회의 손님 측 정식 회원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는 잘못에 원심력을 가동시킨다.
그것이 상대방의 몫으로 떨어짐은 물론이다.
남의 탓만을 하기에
꼰대질을 하는 자는 잘못을 통해 깨달을 수가 없다.
잘못에 애써 구심력을 끌어들여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지혜는 자신을 반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불혹의 나이에 늘어가는 것이 지혜가 아니라
오히려 꼰대 기질임을 뼈아프게 알기에
오늘도 나는 터울거린다.
그분의 긍휼을 얻기 위해 각고하며 내게 묻는다.
왜 나는(!) 그들의 언행을 미워하는가?
왜 나는(!) 그들에게 화가 나는가?
나의 어떤 연약한 면이(!)
그들로부터 아량을 거둬들이려 하는가?
“주여!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Sep. 28. 2015.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