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끼니
매 끼니
마음속에 진경산수화 한 점이 걸려 있다.
볼 때마다 변하는 요상한 그림이다.
산천과 바위의 항상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매번 달라진다.
출몰하는 짐승들이 바뀌는 탓이다.
일전에 뱅갈 호랑이가 포효하며
배경을 드잡이 놓았던 적이 있었는데,
승냥이 떼의 출현으로 곧 행방이 묘연해졌다.
산을 짓밟고 물을 더럽히던 승냥이 떼도
길게 머물지는 않았다.
그림은 한동안 텅 빈 채 방치되었다.
그 사이 특유의 자생력으로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평범한 배경으로 밀려났다.
일군의 하이에나가 들이 닥쳤던 것이다.
배고픈 하이에나들은 닥치는 대로 산천을 헤집었다.
등장하는 것들에 의해서 밀려나고 당하는 것,
배경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금수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힌 진경산수화를 보는 것이 괴롭다.
침통한 표정은 마음이 무엇인가의 배경이 되어
유린당했던 것을 깨닫는 흔적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짐승들이 단한 번도 침범하지 않았던
마음 한 칸이 존재하고 있으니.
높다란 돌탑들이
우후죽순 세워져있는 곳에 눈길이 머문다.
조건반사로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흡족함이 얼굴 전체에 번진다.
그런데 그 때 개코(작은 도마뱀) 녀석이
또르르 돌탑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돌탑이 밑둥치부터 꼭대기까지 흔들리기 시작한다.
올라갔던 입 꼬리가 푹 꺼진다.
야단났다!
형제들아 나는 내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3-14)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해서 유명해진 회심 사건의 주인공,
선교사의 시조,
신학과 목회 두 마리 토끼를 싹쓸이한 능력자,
열정의 화신, 교회 개척의 달인,
신학과 철학 논쟁에서의 황금의 입 …
쌓고자 한다면 끝도 없을 돌탑의 소유주는
바로 사도 바울이다.
화려한 이력과 스팩의 소유자였던 그는 말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업적과 성취는 잊어버리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라고.
화려한 돌탑 같은 것은 개코나 가지라고 던져버리고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달려가길 멈추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그의 말을 반복하여 곱씹고 있었을 때,
의식의 가위질이 뜬금없는 대목을
장엄한 선언 뒤에 붙였다.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 중에서
위대한 선언과 소설의 한 대목이 편집되자
다음과 같이 재생되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로 향하기 위해서
떼어왔던 모든 발걸음은
오늘 그분을 향하는 한 걸음 앞에서는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지금의 한 발을 천국이 아닌 지옥을 향하여 뗀다면
나의 인생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향해
달려온 것이 된다.’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서 경각심이 바짝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내게 말씀 묵상 모임은 끼니다.
말씀으로 지은 영혼의 양식을 먹는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때 맞춰 꾸역꾸역 찾아온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게다가 맛있게 먹을 때도 있지만,
하는 수 없이 때워야 할 때가 보통이라는 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끼니 앞에서 나는 가끔씩 흔들렸다.
먹기 싫어서, 혹은 건너뛰고 싶어서 몸살을 했다.
제멋대로 출몰하는 수많은 짐승들에도 불구하고
지난 십년 동안 쌓아왔던 돌탑들이면
충분하지 않느냐는 합리화를 가동시키고 싶어 안달을 했다.
그러자 소설가의 입이 야박스러웠다.
‘지난 십년 동안 해왔던 모든 모임은
이번 주 모임 앞에서 무효야!’
곁에 있던 사도 바울도 거들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24)
때리는 시어머니와 말리는 시누이 등살에
나는 매 끼니를 해결한다.
그리고 이제 막 지나간 끼니와
앞으로 닥쳐올 끼니 사이에서
마음속 진경산수화를 본다.
문득 저만치에 있던 유실수가 눈에 들어온다.
꽃이 떨어진 자리에
어느새 손톱만한 열매가 맺혀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 23)
#Sep. 16. 2015.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