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기쁨
묵상의 기쁨
행운이었다.
첫눈에 반한 그녀와 대뜸 동거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3년 전, 그녀를 처음 보았던 곳은 자그만 화랑(畫廊)이었다.
소재, 주제, 구도, 양감, 질감, 색감 등
어느 것 하나 맘에 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완전히 넋이 나간 나는 그녀의 아버지 쉬쿠쿠(Shikuku)에게
내 딴엔 고액의 지참금을 쥐어 주었다.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멀리 몸바사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가문과 전통을 깐깐하게 따지는 수집가들의 끌끌거리는 혀를 뒤로하고
나는 이름(제목)도 없는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바퀴 벌레를 비롯해 다수의 곤충들이 득세하는 누추한 곳이었기에
슬쩍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마냥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녀의 주변을 자주 서성이면서 나는 아름다운 그녀를 보고 또 응시했다.
이름이 떠오른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묵상의 쾌락’? 아니다. ‘묵상의 기쁨’이 옳다.
복식(服飾)을 통한 짐작이지만, 아마도 그녀는 수녀인 것 같다.
천주님과 결혼한 거룩한 신부(新婦).
그녀가 신랑인 로고스(성경 말씀)를 안은 채
으쓱 올린 한쪽 어깨에 고개를 가볍게 떨어뜨리고 있다.
표정은 평온한 듯 보이나 꼭 다문 입 때문에 긴장감이 살짝 감돈다.
입 밖으로 곧 황홀경의 찬탄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
나는 조바심을 느낀다.
대체 그녀는 어떤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무엇을 깨닫고 있는 중일까?
진리의 조명은 그녀의 이마로부터 시작하여 날카로운 콧날에 베인 후,
목선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 내려가다 풍만한 가슴에 흥건히 고여 든다.
빛으로 잔뜩 불은 젖가슴은
굶주린 천주님의 자녀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을 듯이 보인다.
묵상을 통해 그녀는 천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분의 자비를 세상에 배달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묵상은
쾌락(pleasure)을 뛰어 넘는 기쁨(joy)에 안착해 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에 따르면 쾌락은 자기 욕구가 채워졌을 때 생겨나는
쾌감(快感)이라는 점에서 자기중심적이다.
그러나 기쁨은 쾌락처럼 구심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원심력적이다.
즉, 기쁨은 반드시 어떤 대상을 지향하기 마련이고,
그 대상에 굴복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대상을 지향할 때 생겨나는 것은 즐거움만이 아니다.
반드시 희생이나 아픔이 동반된다.
허나 이런 고통들은 기쁨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기쁨을 오롯하게 만들어준다.
그렇게 기쁨은 쾌락을 포함하되,
그것을 압도하는 동시에 수많은 고통을 아우르면서 온전해진다.
오래 전, 게티 뮤지엄(Getty Museum)에서
시나이의 아이콘들(Icons from Sinai)을 보고 나오면서
나는 의아해했다.
세인트 캐서린(St. Catherine)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성인(聖人)들의 표정이 하나 같이 시무룩했던 탓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일평생을 타올랐던 자들의 표정이
웃음이 아니라 울상이라니!
적잖이 언짢았던 그 시절의 나는 아직 몰랐던 것이다.
세인트는 쾌락이 아니라 기쁨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들의 우울한 표정은 기쁨의 더 깊은 차원의 표현이라는 것을.
성경 묵상에도 쾌락은 존재한다.
난해하기만 했던 말씀을 분명하게 깨닫는 순간은 분명 쾌락적이다.
하지만 쾌락의 이유만으로 그것을 지속할 수는 없다.
쾌락을 단숨에 제압하는 고통이 그것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 묵상을 오래 해본 사람은 안다.
묵상은 결국 사랑의 이유로 기꺼이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을 선택하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
말씀에 굴복할 때만 비로소 참 자유와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묵상은 말씀이라는 대상을 지향하고, 그것에 굴복하게 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마침내 기쁨을 소유하게 한다.
정작 자신은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도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절규했던 바울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 4:4)
지금 나의 그녀는 묵상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고 있는 중이다.
허나 그녀는 곧 감은 눈을 뜰 것이다.
성경을 닫고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흥겹게 밖으로 나갈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손과 발이 되어 어린 자녀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껏 꼭 다물었던 입이 막 벌어지면
찬송이 메이플 시럽처럼 달고 오묘하게 흘러나오려 한다!
귀한 주님의 말씀은 내 노래 되도다
모든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을
값도 없이 받아 생명 길을 가니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Aug. 26. 2015.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