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찾는 하느님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의 책, 「사람을 찾는 하느님」을 읽고.
첫 만남은 8년 전 LA 윌셔가에 위치한 한 기독교 서점에서였다.
당시 내 손에는 한 수기 공모전에서
부상(副賞)으로 받은 도서상품권이 두둑하게 들려 있었다.
진열대를 누비면서 마음껏 책 사냥을 즐기고 있을 때,
문득 서점 매니저가 참견을 했다.
반백(斑白)이었던 그는 자기 식견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해 보였다.
무슨 대단한 보물을 나눠 주는 것인 양
그는 매우 구석진 곳에서 책을 뽑아 으스대면서 선보였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
첫인상은 별로였다.
추천자도 추천자였지만, 책 자체의 인상이 부담스러웠다.
들고 읽다가는 곧 손목을 못 쓰게 될 것 같은 물리적 무게감(560pages)과
어렵고 딱딱하여 읽다가 소화불량에 걸릴 것만 같은 내용들.
그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한 나는
비교적 가벼운(?) 책들만 골라서 꽁무니를 뺐다.
내 존재의 새로운 지정학적 위치를 알게 된 것은 얼마 전이었다.
월터 부르그만은 유대 영토를 가리키며
‘이 안에 너 있다!’라고 말했다.
낭패감이 들었다.
세 들어 산지 수 십 년이 되었는데도
유대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지의 깨달음이 유다이즘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전에 일면식이 있던 책을 집어 들게 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과의 만남은
오랜 시간 뒤에 그렇게 성사되었다.
이미 ‘안식’을 통해서 만나 본 적이 있던
저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인간을 사랑했던 유대 학자이자,
기독교와의 대화를 추진했던 에큐메니스트다.
그런 저자의 중재로 소개 받은 유다이즘은 놀라울 정도로 친숙했다.
월터 부르그만의 말이 맞았다.
나는 이미 유대 영토 안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유다이즘은 광활하고, 무겁고, 다채롭고, 충만했다.
그리고 유다이즘 학자의 문장도 그에 못지않아서
그것이 머릿속을 지나고,
마음이 책의 행간을 누빌 때마다 즐거움이 수두룩 느껴졌다.
책은 총 3부, 곧 제 1부 하느님,
제 2부 계시, 제 3부 응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유다이즘의 출발이자 중심인 살아계신 하느님을 이야기한다.
하느님의 연관 검색어는 놀람, 장엄함, 신비,
지혜, 임재, 예배, 시간 등이며,
그분은 구원 사역의 파트너로서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2부는 인간을 필요로 하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도달하시는데 성공한 순간인 계시를 말한다.
나아가 짧은 순간 일어난 계시를
시공간 속에 영속되게 하는 본문(the text)과
그것을 집필한 예언자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마지막 3부는 계시에 대한 응답으로써의
미츠바(mitsvah, 善行)를 다룬다.
미츠바는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하는 행위요,
하느님의 파트너로서 인간이 참여하는 하느님의 행위다.
반면에 죄는 하느님이 혼자 계시도록 소외시키는
인간의 행위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주옥같은 문장들은 솔로몬 시대의 백향목이나 은금만큼이나 흔했다.
그중에서 몇 개를 골라내는 일은 분명 고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골라잡는 이유는
기어코 리뷰를 쓰지 않고서는 다음 책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피곤한 철칙 때문이다.
예언자들에게는, 놀람은 생각하는 틀(a form of thinking)이다.
놀람은 지식의 시작이 아니라 지식을 넘어 계속된다.
지식을 얻었을 때 놀람은 사라지지 않는다.
놀람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 태도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근본적인 경탄에 대한 답(答)이 없다.(p.77)
=‘놀람의 대가’가 되라는 저자의 조언 앞에서 망연자실한다.
나잇살이 늘어갈수록 놀람, 경이, 찬탄을 잃어가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허나 나이 탓만은 아니라는 게 저자의 얘기다.
낯설게 하기, 은유 등과 함께 놀라는 감각에 인공호흡이라도 해야 하리라.
유대 전통은 시간 안에는 순간의 계층이 있다고,
즉 모든 시대가 같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모든 장소에서 똑같이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하느님은 모든 때에 똑같이 인간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시나이 사건은 매일 발생하지 않고, 예언은 줄곧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예언자로 뽑히는 시대가 있고,
예언의 목소리가 억압당해 약해지는 시대가 있다.(p.168-169)
=코헬렛의 목소리가 본문에 겹쳐진다. 만사에는 기한이 있고 때가 있다는.
울며 씨를 뿌려도 열매하나 거두지 못하는 실패와 좌절,
그리고 불임을 경험하는 때를 지나는 내게 저자의 말은 분명 위로가 된다.
눈 밝은 사람이 보면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라는 것이
모두 하나의 거대한 드라마 속의 작은 이야기들이다.
사람을 찾는 하나님의 드라마, 그분은 열심히 사람을 찾으시고
사람은 그분에게서 열심히 도망치는 거대한 드라마다.(p.246)
하느님에게로 가는 길은 하느님의 길이다
(The way to God is way of God).
이스라엘의 종교는 인간의 노력보다
하느님의 선수(先手, initiative)에 뿌리를 둔다.(p.247)
=성경의 거대한 이야기에 참여하는 중이다.
나에게 관심이 있는 하나님과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는 나의 쫓고 쫓기는
드라마에 출연하여 열연 중인 것이다.
허나 나는 알고 있다.
결국 나는 그분에게로 가는, 그분의 길을 걷는 중이라는 것을.
오로지 그분의 열심에 의해서.
예술을 이해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분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그분 앞에서 노래를 한다.
우리는 알기 위해 사랑을 해야 한다.
노래하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고는,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고는,
결코 그분을 이해하는 법을 배울 수 없으리라.(p.343)
=그분은 헬라식 교육에서처럼 지, 정, 의의 순서로는 알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의지적인 행함(예배, 계명 준수 등)을 통해서
느낌과 태도를 올바로 가진 뒤,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다이즘은 앎과 행함의 괴리가 기독교처럼 심각하지 않다.
기독교의 병폐는 앎 자체 혹은 써먹기(자랑 등에)위해서 배우는데 있을지도 모른다.
유다이즘은 앎의 대상을 존경하기 위해서 배운다.
그래서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음을 통해 머리로 배워간다.
바로 이점이 귀를 기울이고,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다.
사람은 사람을 위해 미츠봇을 희생해야 한다.
미츠봇을 위해 사람을 희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토라의 목적은 “이스라엘과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에
생경을 가져다주는 데 있다.”(p.396)
다른 모든 계명을 포기했더라도 끝내 토라 공부하는 일을
계속하기만 했다면 토라의 빛이 마침내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갔을 것이라는 말이다.(p.400)
=유다이즘도 과격한 축소주의 곧 율법주의로 인하여 몸살을 앓았던 것 같다.
그래서 유다이즘 학자 헤셸도 아가다(마음, 동기) 없는
할라카(계명)를 경계하고 또 경계하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었다.
토라를 포기하지 않고 읽고 묵상하면
결국 그것이 하나님께로 인도해 줄 것이라는 것을.
이것은 내가 성경 묵상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때로 그것은 아가다 없는 할라카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때 결국 아가다를 회복하여
온전히 그분께로 이끌려갈 것이다.
유대인에게는 미츠바가 아베라보다 더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자주 더 두드러지게 사용되는 용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오히려 이 두 단어의 사용 빈도나 중요성이 반대다.
즉 그리스도교는 미츠바라는 관념을 수용하지 않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서양 언어에는 미츠바의 개념을 담을 적절한 단어가 없다.
반면에, “죄”라는 단어는, 아베라에는 함축되지 않은
실체적인 어떤 것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인생이란 선한 행실과 나쁜 행실의 주변을 맴돌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베라 또는 죄의식(sin-conscious)보다는
미츠바 의식(mitsvah-conscious)을 더 많이 지니도록 훈련받았다.(p.436)
=그리스도의 구원을 죄 사함, 곧 법정 메타포로만 국한 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비록 죄 사함의 국면이 크긴 하지만,
그것에만 한정시킬 경우 죄 사함 이후의 삶이 진공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역시 생명 이상인 풍성한 생명을 주기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점에서 아베라보다 미츠바를 더 강조하는 유대 학자의 말은 신중히 들을 필요가 있다.
희생한다는 히브리어 동사는 가까이 간다, 접근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삶을 단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로 가까이 가져가는 것이다.
우리가 애쓰는 일은, 한 순간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아를 끊임없이 맨정신으로 확인하는 일이요
이웃의 욕구와 문제를 느끼는 것이다.(p.478)
=나는 매일 아침 새끼 양 한 마리를 가지고 그분의 제단에 가까이 간다.
내 삶을 가지고 그 분께 나아간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못한 양을 잡아 제단에 바친다.
그렇게 성경 묵상과 회개는 희생제사가 된다.
미츠바를 행할 기회는 언제 어디에나 있고,
이렇게 언제 어디에서나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인생은 값지다.
바로 이 때문에, 유대인의 신앙은 절망을 모르는 것이다...
“너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할 수 있다.”
선행만으로는 역사를 구원하지 못한다.
하느님께 대한 복종이 우리를 하느님에게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이다.(p.455)
=인생의 가치는 미츠바를 행하는 것에 의해 좌우된다.
현재는 미츠바를 행할 기회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것은 어떤 시간보다 귀하다.
명령을 받았다면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행할 일이다.
미츠바를 복종함으로써 그것을 명령한 분을 닮아가야 할 일이다.
자기중심성이라는 문제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순수하게 하는 길은 자신에 머물러 있기를 피하고
주어진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p.484)
=내면 성찰이라는 미명 아래 자신에게 집중하는 일의 폐해로 얼마나 고생이었던가?
이제 눈을 밖을 돌려 선한 일에 몸을 움직이자.
자아가 건강해지려면 몸이 부지런해야 한다.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거짓 신들에게 충성하기를 거부하는 것,
모든 유한한 상황에 박혀 있는 하느님의 무한한 간섭을 예민하게 느끼는 것,
그분이 숨어 계실 때에 그분의 현존을 증언하는 것,
이 세계가 아직 구원받지 못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고자 태어났다.
우리의 길은 순례의 길이든지 아니면 도피의 길이다.
우리는 세상의 영화에 심취하지 않고 초연하기 위해,
속임수 영광에 휩쓸려 들지 않고 홀로 서기 위해,
유행에 둔감한 자가 될지언정 겉으로만 요란한 것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선택 받았다.(p.498)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 영토의 세입자가 되었으니 나는 일면 유대인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리스도라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얻어 순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니 세상의 영화에 초연하고, 속임수에 속지 않고,
요란한 것에 굴복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하리라.
비록 실패할 때가 많을 지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보다 더 나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는 그분이 자비하시기 때문이다.
오래전 그 매니저처럼 흰머리가 하나 둘 늘고 있다.
그의 추천은 옳았다.
비록 8년이나 지나 읽었지만, 이 책은 몹시 즐겁고 유익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난 후에 읽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세 들어 사는 곳을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내 집의 가치, 중요성, 독특성이 더 오롯해지는 듯하다.
흐음.
#Aug. 20. 2015.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