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의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또렷하고 간결한 드로잉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책의 논지는 시종일관 적나라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납니다.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
혁명은 거기에서만 일어납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중에서
저자는 역사적 인물들, 곧 루터, 무함마드,
중세 해석자들, 그리고 위대한 문학가들을 목탄 삼아
종이 위에 문학의 혁명성을 굵은 선으로 그려냈다.
명쾌한 드로잉은 분명 독서를 시원하게 했으나,
주제의 잦은 반복 때문에 지루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자기주장을 진리로 밀어붙이기 위해서
저자는 책 전체에서 ‘문학’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확장시킨다.
‘지금의 문학’은 싱싱한 물과 기름이
모조리 빠져버려 볼품없이 축소된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미역국을 끓이기 위해서 마른 미역을 물에 불리듯
그것을 역사가 담긴 용기에 담은 후 불린다.
그렇게 퉁퉁 불은 문학은 읽고, 쓰고, 노래하는 모든 것
곧 텍스트(성서와 코란을 포함한 성전(聖典)과
법을 포함한 각종 문학 작품들), 음악, 춤 등을 모조리 아우른다.
생기를 되찾은 문학을 천군만마로 저자는
그것이 혁명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거침없이 밀어붙인다.
사사키 아타루는 자신의 처녀작이자,
이 책의 전작인 「야전과 영원」을 심심찮게 언급한다.
그것에서 이미 언급했다는 둥,
그것에서 미처 다뤄보지 못했는데
앞으로 기회가 되면 다뤄보겠다는 둥,
책의 전개상 다룰 수 없어 넘어가는 문제들이
아쉽다는 둥 하는 언급이 개인적으로는 현학적으로 느껴졌다.
저자의 전작을 읽어보지 못한
준비가 되지 않은 독자의 자격지심일 수도 있지만,
눈살이 찌푸려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독서와 작문에 대한 생각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독서는 정보 수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독자 자신의 존재의 변형을 위한 것이다.
언어가 근원적으로 인격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어로 된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것의 저자와 만나는 일이며,
그 과정에서 독자는 영향을 받아
반드시 변형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렇게 일어난 변형을 확대하여 저자는 ‘혁명’이라고 부른다.
자신이 말하는 것과 성전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은,
성전이나 책에 무엇이 쓰여 있건 자신이 멋대로
언제 종말이 올지 지정할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근거가 자신이니까요.
근거는, 텍스트라는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으니까요. …
그들에게 바깥은 없습니다.
자신의 바깥은 없고, 모든 것은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은 읽지 않더라도
성전에 쓰여 있다는 것이 되고,
자신의 죽음은 저절로 세계의 죽음과 겹치게 됩니다.
완전히 병들어 있습니다.
이리하여 ”읽은 수 없는 것을 읽는다‘는 고난과는 반대인
“어차피 읽히는, 읽는 것밖에 읽지 않는,
읽지 않아도 이미 안다며 얕보고 읽지 않”는 안일함이
죽음을, 한없이 죽음을 낳는 것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중에서
저자에게 독자 반응 이론은 가당치 않다.
그는 개인이 뭔가의 원인이고 행위의 주체라는 사고를
오류요, 거짓이라고 생각하며,
특별히 독서에 있어서 독자는
능동적이 아니라 피동적이라고 여긴다.
즉 사람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독자를 읽는 것이고,
책이 아니라 독자가 읽힌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단번에 일어날 수 없다.
그것은 텍스트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즉 반복적인 독서와 그것을 다시 씀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케냐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 온지도 3년 반이 되었다.
케냐에서의 삶은 내겐 가히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있음직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니 말이다.
이런 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성경 묵상 때문이다.
성경을 반복해서 읽고, 다시 쓰기를 되풀이하다가
여기 까지 오게 된 것이다.
오늘도 나는 성경을 읽고, 다시 쓰기를 거듭한다.
문득, 일상적인 습관인 이 일이 두렵게 느껴지려 한다.
정보는 책을 읽을 때 떨어지는 떡고물임에는 틀림없다.
비록 저자는 질색을 하겠지만,
이 책을 통해 얻은 인상적인 정보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정보란 명령이다’라는 하이데거의 말이다.
정보를 물어오는 사람 앞에서 나는 쉽사리 바보가 되고 만다.
빈약한 정보를 약점이라고 느끼지는 않지만,
바보 취급을 당하는 것이 기분 좋을 리 없다.
그래서 관점을 바꿔보기로 한다.
정보에 혈안이 되어 정보를 물어오는
사람들의 불안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옳다고 믿을 만한 근거를 정보에 두고,
그것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안쓰러워하기로 하자.
인상적인 다른 정보는 도스토옙스키의 새삼스러운 위대함이다.
그는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읽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주옥같은 문학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누구나 한목소리로 목청을 높여 드높이는 세계적인 작가가
그런 척박한 상황 속에서 쓰기를 했다는 사실에
울컥한 마음이 든다.
애석하게도 그의 텍스트를 만나본 적이 없다.
여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뿐이니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지만 멋쩍기는 하다.
허나, 무참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은 그의 작품들을
내 반드시 읽어 보리라.
발터 벤야민이 말했습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라고요.
발소리를 들어버렸던 것입니다.
도움을 받아버린 것이지요.
그렇다면 누구의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발소리를 내는 것조차 거부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발소리를 내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터입니다.
들려주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입니다.
한 발짝이라도 좋으니까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중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되어주기 위해서 반복해서 읽고 쓰고,
다시 읽고 고쳐 쓰는 일에 지쳐버린 요즘,
뜻밖에도 아직은 어색한 친구의 발소리의 도움을 받았다.
사사키 아타루의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어둔 밤중에 걷다가 지친 내겐 들려온
작은 발소리로 기억 될 것이다.
#Jun. 22. 2015.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