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낳기
관계 낳기
목적어 뒤에서만 오롯해진다.
‘낳다’는 타동사다.
‘낳다’를 쓸 때마다 저릿해진다.
아기, 새끼, 알...
이런 존재들에게 목적을 두고 관계를 맺기 위해서
주어가 받아야만 하는 통증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이 둘을 낳았던 경험 탓일 것이다.
물론, 십여 년 전의 생생했던 아픔이
지금은 ‘진통’이라는 추상어로 납작해졌지만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있다.
‘낳다’의 목적어가 매정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통 뒤에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은 뒤,
곧잘 기쁨을 불러들인다.
아프게 낳은 아이 둘이 통증을 능가하는
즐거움을 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올랐다.
그곳은 새 백성을 낳기 위한 해산의 장소였다.
끔찍한 고통이 십자가에 똬리를 틀었다.
죽음이 큰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빨을 그분의 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희롱하듯 숨통을 조이고 풀기를 반복했다.
격렬한 고통이 온몸에 진동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는
흔한 욕지거리 한마디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다만 신음소리만 흘러내렸다.
그분은 견뎠다.
당장의 끔찍한 고통이
장차 올 기쁨을 능가할 수 없음을 시위했다.
이런 와중에도 그분은 창조주답게 무언가를 낳았다.
어머니 마리아와 사도 요한 사이의 섬이었다.
섬의 이름은 모자(母子)였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한복음 19:26-27)
십자가에서 예수께서는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셨다.
자신의 어머니와 아들 같은(!) 제자 사이에
‘모자’라는 이름을 새로이 붙여주셨던 것이다.
이것은 아들과 아버지 같은 스승을 잃고
어렵게 살아가야할 그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부활과 승천으로 예수께서 완전히 부재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더욱 어머니와 아들이 되었다.
그분의 빈자리에도 불구하고
넉넉하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게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들로 불리면서 기억했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 새로운 섬을 만들어주고 떠난 그분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말씀을.
십자가 곁에서 우리는 가족을 잃었다.
아픔으로 쩔쩔매던 우리에게 그분은 한 섬을 낳으셨다.
‘친구’라는 이름이었다.
친구로서 우리는 서로를 집에 맞아들여 십자가의 말씀을 나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가족의 부재를 들여다보면서,
눈물도 나누고, 여전히 어렵기만 그것의 의미도 나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 우리는 아무것도 나누지 못한다.
우리의 말이 거대한 아픔에 침수되곤 했기 때문이다.
때가 되어 눈물이 썰물로 빠져나가면
축축하게 널브러진 말들을 찾아 널어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말려줄 바람과 햇살을 구하면서,
우리는 기억한다.
어머니 마리아와 사도 요한처럼
우리 사이에 섬을 창조해주신 그분, 그 말씀을 기억한다.
그분이 낳으신 섬들을 떠올려본다.
섬들을 사이에 두고 있는 많은 우리를 헤아려 본다.
여러 어머니들과 친구들을 추억해본다.
그리고 오늘도 십자가에서 관계를 낳으시는 그분을 기억해본다.
앞으로 애를 써서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억하기로 한다.
사랑하기로 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기에 말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Mar. 18. 2015.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