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
호소다 마모루의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보고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이 몽환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주제를 담은 첫 번째 아리아가
피아노를 통해 대기를 노곤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느닷없이 타임 리프 능력이 소녀 마코토에게 주입되었다.
그러자 음악은 곧장 제 1 변주곡으로 진입했다.
이후 영화는 골드베르그 변주곡의 구조를 따라간다.
마코토가 타임 리프 능력으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가까운 과거들을 계속해서 되풀이 했던 것이다.
골드베르그 변주곡은 총 30개의 변주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곡의 구조는 주제를 담고 있는 아리아를 필두로
30개의 곡들이 쉴 새 없이 변주되다
마지막으로 처음의 아리아로 돌아가 귀결된다.
지속적인 반복과 변주 때문에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시간이 정지해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글에 비유한다면,
그것은 시간을 타고 전진하는 서사라기보다는
시간을 등지고 앉은 세밀한 묘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골드베르그 변주곡, 아리아
사랑스러운 소녀 마코토의 일상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녀는 지각대장에 덜렁이다.
미래에 대한 꿈같은 것도 없다.
그녀의 존재의 집에는 진지함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가벼운 헬륨 풍선처럼 가볍게 둥둥 떠다니며
오늘을 살아가는 중이다.
다행인 것은 그녀에게 코스케와 치아키라는
멋진 남자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야구에 뿌리를 두고 우정을 꽃피운다.
그런 마코토가 변하기 시작한다.
타임 리프 능력가 그녀에게 떨어진 후부터 말이다.
#2. 골드베르그 변주곡 장조, 발랄 경쾌하거나 어리석거나
마코토는 타임 리프를 통해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 그것을 변주한다.
초반부는 활발하고 경쾌하기만 하다.
동생이 먹어버려서 속상했던 푸딩을 먹기 위해 몇 번,
노래방 시간을 연장하기 위해서 몇 번,
용돈을 다시 받기 위해 몇 번,
그렇게 마코토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낭비한다.
제가 가진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른 채,
가볍게 낭비하는 그녀의 철없음과 순수함이 부럽도록 예쁘다.
젊음의 특권 중 하나를 시간 낭비라고 한다면 핀잔을 들으려나?
암튼, 영화 초반부는 발랄 경쾌한 동시에 귀엽게 어리석다.
#3. 골드베르그 변주곡 단조, 애잔하거나 비장하거나
타임 리프의 부작용이 나타난다.
시간을 오가며 제 마음대로 사건을 주무르던 마코토로 인하여
관계가 어그러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코스케와 치아키가 위험을 당하게 된다.
타임 리프 능력이 무제한이 아니라
제한된 것임을 뒤늦게 깨달은 마코토는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어리석은 아이,
그리고 제 진심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미련한 아이가
타임 리프를 타고 어른이 되어 간다.
어떻게든 사건을 무마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소녀가 애잔하기도 하고,
덕분에 급박하게 어른이 되어가는 그녀에게서
비장미가 느껴지기도 한다.
#4. 골드베르그 변주곡, 아리아 다 카포
영화의 마지막은 마코토가
타임 리프 능력을 처음 가졌던 때로 돌아간다.
그러나 영화 말미의 마코토는 더 이상 처음의 그 소녀가 아니다.
비록 골드베르그 변주곡의 마지막 아리아가
첫 번째 아리아와 같다 할지라도,
수 십 개의 변주를 마치고 난 뒤의 아리아가
첫 번째 것과 똑같이 들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 시간이 아니라 마코토가 변주되었다.
꿈이 없던 그녀에게 꿈이 생긴 것이다.
치아키가 현재에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그림,
미래에는 유실되어 버린 그 그림을 지켜내겠다는 꿈이 생긴 것이다.
타임 리프와 상관없이 시간 안에서
모든 아이는 결국 변주되고 만다.
마코토의 경우처럼 사랑과 책임감이 있는 아이라면
성장하는 쪽으로 변주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음, 상상하기도 싫다.
시종일관 달리고 구르던 마코도.
그녀를 담아내고 있는 두 가지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처음으로 타임 리프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강변을 수직으로 달려 내려오던 모습과
마지막으로 치아키를 만나기 위해
카메라 프레임과 경주하며 수평으로 질주하던 모습이 그것이다.
길거리도, 운동장도, 강변도 아닌 시간을
수직적으로, 또한 수평적으로 달리는 소녀를 보면서 생각한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나는 시간을 달렸던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시간이 내내 나를 달리고 있었지 않았는가? 하고.
#Dec. 17. 2014.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