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엔돌 무녀의 식탁

창고지기들 2014. 4. 15. 19:25

 

 

 

 

 

입맛을 잃은 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었다.

사무엘은 이미 죽었고,

이스라엘의 일이라면

두 팔을 걷어붙이시던

여호와마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셨다.

블레셋과의 결전을 코앞에 두고

사울은 버림받은 고아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직감과 함께

스멀스멀 들어온 공포가

마음을 사정없이 짓이겼다.

속수무책이었다.

견디다 못한 그는

결국, 자신이 만든 법을 어기고

엔돌 무녀를 찾아가

사무엘을 불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간절하게 만나고픈 이가

하필 사무엘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사무엘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마음은 애증으로 복잡했다.

별 볼일 없던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던 어미이자,

남몰래 다윗에게 왕의 기름을 부어

평생 지옥에서 살게 만들었던

배신자, 사무엘.

하지만 그라면 누구보다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줄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사무엘상 28:17-19)

 

 

막연했던 직감이

사무엘의 말을 통해서

기정사실이 되었다.

사울을 애써 받치고 있던

기둥 같은 두 다리가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천하를 호령하던 왕이

아이처럼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엔돌 무녀에게 불쌍히 여기는

어미의 마음이 고여 들었다.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순종하였으니

그런즉 청하건대

이제 당신도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내가 왕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사무엘상 28:21-22)

 

 

목숨을 걸고

왕에게 순종한 대가로

엔돌 무녀는 자신이 지은 밥 한 끼를

그에게 대접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삶에의 욕구이자 의지인 입맛을 잃은 그가

거절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엔돌 무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곁에 있던 신하들도 거들었다.

그렇게 그녀는 가지고 있는 식재료들 중

최고의 것으로 급히 밥상을 차렸다.

 

송아지 요리와 무교병이 놓인

엔돌 무녀의 식탁에

사울과 신하들이 함께 앉았다.

입안은 여전히 깔깔했다.

하지만 사울은

입맛을 달래가면서

애써 쇠고기를 씹었다.

신하들도 그를 따라 음식을 넘겼다.

 

 

처연했던 그 밤의 식사가 끝났다.

엔돌 무녀의 음식을 먹고

가까스로 기운을 차린 사울은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의연하게

자신의 전장(戰場)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자신의 전장을

마지막까지 지키며

그 곳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그 날,

엔돌 무녀의 식탁에는

내 아비도 계셨다.

아비는 사울과 함께 앉아서

힘들게 식사를 하셨다.

하루가 다르게 병색이 짙어져 가는

아비의 입맛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였다.

 

밥을 먹는 것이

고역인 그와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것은 곤욕이었다.

그러나 나는 같이 있는 동안

늘 그와 함께 밥을 먹었다.

 

병상에 누워 계시는 아비를

바라보는 것 역시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또한 마다하지 않았다.

아비의 다리를 악착같이 주무르면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빠르게 야위어 가는 아비를

안타깝게 응시할 때마다

숙주(宿主)를 떠올리곤 했다.

암은 아비의 몸을 숙주로 삼아

그의 지방과 근육을

냉큼 빨아들이고 있었다.

타나토스(죽음)의 아들인 암은

내 아비의 입맛과 생명을 착취하여

제 아비에게 바쳤던 것이다.

 

 

요즘 내 아비는

그 때보다 더욱 힘들어지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매일

엔돌 무녀의 식탁에 앉아서

그것이 비록 미음일지라도

끼니를 거르지 않는다고 하신다.

 

어렵게 식사를 하시고

자신의 전장으로 나아가는

아비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쏟아진다.

오늘도 그는

누구도 대신해서 싸워줄 수 없는

그 전쟁에 임할 것이다.

그리고 사력을 다해

타나토스와 맞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싸움이 끝날 때,

십자가에서 타나토스를 죽여 버리신

영생이신 그 분의 품에

그는 고요히 깃들 것이다.

 

 

그 때까지 아비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마련된

엔돌 무녀의 식탁에서

계속해서 힘을 얻으시기를,

그래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전장에서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원한다.

 

 

키리에 엘레이손!

 

 

 

#Apr. 14. 2014.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