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굿바이 미스터 9시 일꾼

창고지기들 2013. 11. 22. 15:56

 

 

 

 

“그런즉 내 상(reward)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고린도전서 9:18)

 

 

Reward라 함은

수고한 일로 인해서 받는

보답, 보수, 사례를 의미한다.

 

이러한 리워드가 창조되기 위해서는

먼저, 수고한 일이

상대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상대는

그 유익으로 인해 수고한 자에게

기꺼이 보답하고 싶어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선결 조건이 충족되면

리워드는 흔히 감사의 말이나,

수고한 자를 귀히 여김,

혹은 물질 등으로 구체화 된다.

 

 

바울의 수고로 인하여

복음이 고린도 지방에 전파되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

카멜레온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기꺼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이 되었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이 되었으며,

연약한 자들에게는 연약한 자가 되었다.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말이다.

(고린도전서9:20-2)

 

이와 같은 바울의 수고로

결국, 복음은 고린도 교회를 낳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리워드를 받을 만했다.

즉,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마땅히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했고,

그를 존귀하게 여겨야 했으며,

물질로 그의 생활과 사역을

도와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리워드를 마다했다.

자신에게 리워드는 ‘복음을 위해서

일한 것 자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린도전서 9:23)

 

 

 

마흔 번째 생일 날 새벽,

나는 그 분께 선물을 구했다.

아니, 정확히 나는 리워드를 구했다.

그러자 그 분이 말씀하셨다.

 

“너는 이미 상을 받았다.

복음에 참여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음이 비딱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건 바울에게나 리워드라고요!”

 

 

사춘기 아이처럼

나는 마음의 문을 쿵 닫아버렸다.

그리고 뾰족하게 웅크리고 앉았다.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몇 번 두드리다 말겠지 생각했는데,

문 밖의 타자는 집요했다.

하는 수 없이 심드렁하게 문을 열자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을 9시 일꾼이라고 소개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그 9시 일꾼이요?”

 

 

“맞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어요?”

 

 

“당신도 제 억울한 사연을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포도원을 가꾼 저나

종일 놀다가 오후 5시께 온 일꾼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 우리 함께 연대해서

포도원 주인에게 맞서 투쟁합시다!”

 

 

그는 머리끈 하나를 내밀었다.

머리끈에는 ‘포도원 주인은

차별적 리워드를 보장하라!’라고 쓰여 있었다.

 

그의 호전적인 태도는

나를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둘러대고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그는 가타부타 확실히 얘기해줄 때까지

문 앞을 떠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문 밖에서 9시 일꾼이 부르는

투쟁가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어쨌든 나는 그에게 대답을 해야 했다.

부담감이 밀려왔다.

그래서 일단은 방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딱히 갈 데가 없었다.

그래서 9시 일꾼이 일했다던

그 포도원을 찾아가기로 했다.

 

저만치에 한 사람이 홀로 서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9시 일꾼의 표정과는 사뭇 다른

평온함이 흘러넘쳤다.

그는 자신을

오후 5시 일꾼이라고 소개했다.

 

 

“9시 일꾼은 화가 잔뜩 나있던데,

당신은 마냥 행복해 보이네요!”

 

 

나도 모르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뛰쳐나왔다.

평온하던 5시 일꾼의 얼굴에

붉은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저는 9시 일꾼이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요!”

 

 

“하루종인 뼈 빠지게 일하고도

당신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9시 일꾼한테 미안하지는 않고요?”

 

 

“미안하다니요?

포도원 주인님께서 약속하신

한 데나리온을 그도 받지 않았나요?”

 

 

“그야, 뭐 그렇긴 하지만...”

 

 

“5시에 가까스로 포도원 일꾼이 되기까지

제가 어떻게 지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종일토록 서성거리면서

고용되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두려움과 불안함,

그리고 배고픔에 휩싸여서 지냈답니다.

그에 비하면 일찍부터 포도원 일꾼이 된

9시 일꾼은 얼마나 축복 된가요?

그는 주인의 포도원에 소속된 소속감으로

하루 종일 평온하게 포도원을 가꾸었을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때마다 나오는 새참이며, 간식이며,

잘 익은 포도까지도

마음껏 즐겼을 것 아닙니까?”

 

 

포도원 일꾼 이야기는 이렇게 맺는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태복음 20:16)

 

그리고 사도 바울의 리워드 이야기는

이렇게 맺는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린도전서 9:27)

 

나는 두 개의 엔딩을 놓고

한참 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

9시 일꾼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머리끈을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당신의 투쟁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그냥 돌아가세요!”

 

 

나는

복음을 위해 케냐에서

이렇게 무명인으로 사는 것 자체,

사막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침묵과 고독에 휩싸여 견디는 것 자체,

진리와 관계하면서

고통스럽게 변화 중인 것 자체가

나의 리워드임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여전히 어리석고,

여전히 시각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러한 리워드가 별로 기쁘지는 않지만 말이다.

^^;

 

 

저만치 9시 일꾼이

등 돌리며 걸어간다.

지치지도 않는지 주먹을 불끈 쥐고

투쟁가를 힘차게 불러대며 간다.

사라져 가는 그를 향해 나는 말한다.

 

 

“굿바이~ 미스터 9시 일꾼!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

 

 

 

#Nov. 20. 2013. 사진 & 글 by 이.상.예.

*) 사진은 몸바사의 와타무 해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