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창고지기들 2013. 7. 7. 13:38

 

 

 

 

저자 유진 피터슨은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에서

다윗의 내재성(?!)을

드러내는데 집중한다.

다윗의 내재성이란

역사적 시공간에 뿌리박은

한 인간인 다윗이

가장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삶의 정황 속에서 끊임없이 투쟁했던

일상의 영성을 의미한다.

 

이렇게 그가

다윗의 내재성에 집중한 이유는

예수님의 이야기로부터

최대의 유익을 얻기 위해서다.

그는 먼저 다윗 이야기 속에

우리의 상상력이 흠뻑 젖어들게 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8피트 수심의 예수님의 이야기에

풍덩 빠져 자유롭게 헤엄치기 위해서는

먼저 3피트 수심의 다윗의 이야기에서

헤엄치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서

다윗의 내재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다채롭게 연결시킨다.

그렇게 다윗의 내재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포개지면서

초월성으로 도약하게 된다.

 

 

특별히 저자가

다윗의 내재성을 이야기하면서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다윗의 다윗다움이다.

그에 의하면 다윗이

가장 다윗다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삶을 살았기 때문에

다윗은 가장 다윗다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다윗의 다윗다움은

나아가 인간다움을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인 의(義) 안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인간답게 살았다.

이는 신이 되려고 하다가

결국 인간 이하로 전락한

수많은 왕들과 정확하게 대비된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내게 구체적으로 충고해 주었던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너의 일을 왕업으로 하라.

 

“일은 그 기원이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에 있으며,

따라서 인간이 너무도 쉽사리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장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위험한 유혹의 장도 된다.

우리는 일을 잘 하거나 좋은 일을 할 때

정말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그래서 급기야 우리는 자신을

신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기 쉽다.

자신을 신이라 생각하면 하나님이 필요 없게 된다.

적어도 하나님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사울은 좋은 일을 하는 와중에 죄를 지었다.

사울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 와중에

그만 하나님께 기름부름을 받은

왕의 신분에서 몰락하고 말았다.”

 

일을 생산성이나 효율성으로

표현하길 강요하는 세상에서

선교사는 종종 사울 왕이 되고 만다.

선교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주신 왕업이 아니라

생산성과 효율성으로 평가되는 일이 될 때

그것은 거룩성을 잃은 타락한 비즈니스가 된다.

 

“주여! 제가 하는 모든 일이 왕업이 되게 하소서!”

 

 

2. 골리앗에게 압도당한 타락한 상상력을 제거하라.

 

“골리앗에게 압도당한 타락한 상상력은

다윗을 보잘 것 없게 여겼다.

골리앗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다윗을 멸시했다.

악에 의해 우리의 상상력이 지배당하고

우리의 사고방식이 좌우 되며

우리의 반응이 결정되는 순간,

우리는 선한 것과 참된 것과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없게 된다.”

 

내 눈에 이곳은

보잘 것 없고, 엉성하고,

심지어 엉망진창으로 보인다.

나의 상상력은 여전히

북미 문화의 세속적 세계관이라는

골리앗에 압도당해 있는 것이다.

 

주여!

당신의 실재 안에

더욱 깊이 잠기게 하소서!

그래서 엘라 골짜기의 골리앗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당신의 이름으로

조약돌 다섯 개를 가지고

그와 담대히 맞서 승리하게 하소서!

 

 

3. 네 안의 도덕주의를 깨트리라.

 

“도덕주의는 모든 상황에는

우리가 분별하고 선택하고 수행할 수 있는

분명한 옳은 것이 정해져 있다는

확신에 입각해 있다.

그것에 따르면 영성이란 전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이렇게 해서 도덕주의는

우리의 영혼을 짓눌러 버린다.

거기에는 어떠한 자비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비자 문제(?!)로 끙끙 앓으면서

나는 내 안에 도덕주의가

버젓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비자 만료일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도덕주의는

하나님의 뜻보다 항상 우선시 되어 왔다.

그래서 나는 함께 일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비난했고,

나아가 하나님께 합리적으로(!) 불평했다.

이 와중에 내 영혼은 얼마나 곤고했던가?

 

주여!

나를 가두고 있는 도덕주의를

당신의 성령의 불로 태워주소서!

저로 당신의 거대한 법 안에서

자유롭게 뛰어 놀게 하소서!

 

 

4. 슬플 때 시를 쓰라.

 

“우리는 슬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비가를 지으며 슬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를 그 때 그 때의 기분을 좋게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게 될 것이다.

그러면 거절당할 때마다

그 현실을 부인하려 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결국 타인의 거절 여하에

좌지우지될 것이다.

실패할 때마다 그 현실을 회피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결국 그 실패는

우리의 삶을 빈곤하게 만들 것이다.

고통과 상실, 거절과 실패에 대한

부인과 회피가 쌓여 감에 따라

우리는 점점 우리 이하의 존재,

남을 하찮게 여기는 하찮은 존재,

거짓 미소를 띤 빈껍데기가 되어 갈 것이다.”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만큼

몸에 시가 잘 고일 때도 없다.

케냐에 와서 쓴 시가 꼬박 열편이다.

하~

 

시로 슬퍼하고,

신음하고, 절규할 수 있게 하시는

나의 뮤즈이신 당신께 감사합니다!

 

 

5. 스루야의 아들들이 항상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우리는 그간 동지라고 믿었던 이들 때문에

오히려 우리 삶이 비참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게다가 그들은 지금 자기들이

우리 삶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들은 지금 최선을 다해 우리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멋대로 자신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행동한다.

이들이 바로 스루야의 아들들이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관심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지만 살아가는 방식에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갈 뿐이다.

어떤 방법으로 일을 하느냐는 중대한 문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해야 한다.

이기적 이용(아브넬)이나

폭력(요압)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은

스루야의 아들들의 세상이다.

그러므로 스루야의 아들들을 만난다고 해서

어째서 이런 만남이? 라며

의아해 할 것은 없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고,

나 역시 그들과 한 패가 되어

다윗을 힘겹게 할 수도 있으니,

철저히 외부로부터 임하는

구원을 겸손히 바라라!

 

 

 

아홉 번째로 만났던

유진 피터슨의 책에는

새로운 것은 없었다.

대신에 익숙한 편안함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내겐

새로움이 주는 갗 볶은 흥미가

익숙한 편안함이 주는

잘 익은 통찰보다 못하다.

그래서 나는

익숙하고도 편안한

유진 피터슨의 언어가 좋다.

그가 해주는 진심어린 충고가 좋다.

 

가장 나답게 살기를,

그래서 가장 인간답게 살기를,

겸손히 그 분께 간구하며

책을 덮는다.

 

 

 

#Jul. 6. 2013.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