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처럼
베드로와 요한은 한 팀이다.
그들은 함께 동행 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능력 있게 전했다.
누가는 이들의 팀 사역을
사도행전 3장과 4장,
그리고 8장에 구체적으로 적어 놓았다.
그런데 사도행전 속
그들의 팀 사역은
주로 베드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베드로는 전면에 나서서
설교를 하고, 병자를 고치고,
죄를 꼬집어 회개를 촉구한다.
이때 요한의 존재감은
그저 베드로와 함께 있는 자,
즉, 남자 주인공의 친구쯤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교회의 그 누구도
요한을 베드로의 들러리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요한은
예수님께 가장 사랑을 받았던 제자이자
복음서와 계시록의 저자로서
교회 역사의 초석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이러한 요한은 내게 특별하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요한의 팀 사역을
남편이님과 나의 팀 사역으로 치환시켜 볼 때,
나의 역할은 단연 요한이기 때문이다.^^;
이 곳 케냐에서 전면에 나서서
실제적으로 사역을 하는 베드로는 남편이다.
나는 그저 그와 함께 있는 요한일 뿐이다.
그렇게 나는 요한처럼
그 분의 사랑을 흠뻑 받는 일에 충실하며,
말씀과 관련된 글들을 여러 가지 형식(!)으로
수없이 쓰고, 쓰고, 또 쓰는 중이다.
*
‘두 사도(베드로와 요한)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사도행전8:25)
예루살렘 교회가
빌립이 개척해 놓은
사마리아의 한 성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했다.
그 곳에서 그들은
성령 세례를 베풀었고,
마술사 시몬 일을 지혜롭게 처리했으며,
주의 말씀을 능력 있게 증언했다.
사역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냥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들은 돌아가는 여정 중에 들린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했다.
사마리아의 한 길을 걷고 있는
베드로와 요한을 뒤따라가 본다.
수다가 한창이다.
마술사 시몬 이야기,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그들은 환희와 감탄에 젖어 있다.
그러다 어느 길에 들어서자
그들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든다.
그 옛날 그 길을 함께 걸었던
예수님과의 추억에 목이 멘 것이다.
갑자기 요한의 얼굴에
두 줄기 강이 흐른다.
그의 소매가 눈물로 축축하게 젖는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누가복음 9:54-56)
오래 전 그는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사마리아의 그 길을 걸었었다.
그 때 한 사마리아의 마을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배척했다.
화가 난 요한은 사마리아를 저주하길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를 나무라셨다.
저주 대신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요한은 비로소 예수님의 마음을
아주 조금 알 것만 같다.
결국 요한은 주저앉는다.
그리고 어린 아이처럼 운다.
주님, 주님!
주님을 부르며 흐느껴 운다.
*
남편이님이 사역을 하고 있는
아프리카 학교는 내겐 사마리아다.
하나 둘 떠나는 선교사들,
셋 넷 일어나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행정들,
다섯 여섯 행해지는
오만과 냉대를 셈하다 보면
나는 그 옛날 요한처럼
그들을 향해 저주를 날리고 싶어만 진다.
그 때마다 주님은
나를 돌아보시며 혀를 끌끌 차신다.
“불쌍히 여겨라.
이 모습이 그들의 끝이 아니니
나를 믿고 견뎌라.”
나는 입술을 꼭 깨문다.
그 옛날 요한처럼.
*
그 길에 주저앉은 요한이
주님을 부르며 여전히 흐느끼고 있다.
나는 그의 곁에 쪼그리고 앉는다.
그가 젖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내 손이 그의 눈물로 적셔진다.
내가 그에게 말한다.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당신이 일어나 그 길을 걸어야
저 역시 당신의 뒤를 따라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가 베드로의 손을 잡고
예루살렘을 향해 저만치 걸어간다.
나는 아직 사마리아 그 길에 서 있다.
저주를 복음으로 바꾸시는
그 분의 사랑에 더 깊숙이
침잠하기 위해서 말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Jul. 3. 2013.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