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샘가의 사랑(Love at the Fount of Life)
GIOVANNI SEGANTINI, Love at the Fount of Life, 1896
지오반니 세간티니의 별명은
‘알프스의 화가’ 혹은 ‘산악 화가’다.
별명답게 그는 알프스를 배경으로
그 안에서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을 주로 그렸다.
그렇다면 과연 세간티니에게 알프스는 무엇이었을까?
부모를 여의고 집 떠나와
거리의 아이로 살아가던 세간티니에게는
국적마저 불분명했다.
이 지긋지긋한 국적 문제로 세간티니는
사랑했던 아내와의 혼인신고도 못했고,
국제 미술전에 출품을 못하기도 했다.
세간티니는 자신을 이탈리아인으로 생각했지만,
이탈리아는 끝내 그를 국민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에 스위스가 국제 미아였던 그를 거둬주었다.
그 후 세간티니는
오랜 물리적, 정서적 방랑 생활을 마무리하고
스위스의 알프스에 뿌리를 내리며
본격적으로 그림에 몰두했다.
그러니까 세간티니는 알프스에서
화가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그렇게 그에게 알프스는
자신을 거듭나게 한 미지의 자궁이요,
젖을 먹여 길러준 그리운 어머니요,
안정감을 갖게 해준 떠나간 아버지이자
그림을 가르쳐준 유일한 스승이었을 것이다.
험난했던 여정 때문이었는지
그의 그림에는 종종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위의 작품 ‘생명 샘가의 사랑’은
그늘이 한 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살짝 불안한 것이 있다면
날개 달린 천사의 알 수 없는 눈빛뿐이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신화적인 느낌을 준다.
‘생명 샘가의 사랑’이라는
제목이 주는 뉘앙스며,
커다란 날개를 가진 천사며,
사랑에 도취된 연인들의 복식이
의도적으로 연출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배경은 알프스의 어느 산봉우리 같다.
오른쪽의 나무를 제외한 모든 식물들은
주로 산 정상에서나 자라는 키 작은 것들뿐이다.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것을 보면
계절은 늦봄인 듯싶다.
한 쌍의 연인은
마치 샴쌍둥이처럼 꼭 붙어있다.
자신들은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듯이
서로를 만끽하는 연인들이
부럽도록 아름답다.
연인들의 앞에는
생명의 샘이 기다리고 있다.
샘 이후로 길이 나있지 않은 것을 보면,
샘은 그 길의 끝이 분명하다.
그런데 천사가 자신의 날개로
샘을 감추고 있다.
그래서 샘 곁에 이르지 않고서는
그 곳에 샘이 있다는 것을 절대로 알 수 없다.
연인들이 지금처럼
사랑에 도취되어 정신없이 걷다보면
그들은 머지않아 곧 생명의 샘에 빠질 것이다.
생명의 샘에 빠진다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
혹시 천사가 그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
영원히 사랑하게 해줄까?
연인들이 걷고 있는 곳은
제법 길다운 길이다.
높은 산봉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선명한 길이 나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곳을 지나간 것이 분명하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저렇게 높은 산봉우리에 길을 냈던 것일까?
또한 저 연인들은 어떻게
생명의 샘이 있는 곳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
그림을 찬찬히 보고 있잖니
칼릴 지브란의 시가 등을 두드린다.
‘사랑이 그대를 부르거든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힘들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를 감싸 안거든
그에게 온 몸을 내맡기라.
비록 그 날개 안에 숨은 칼이
그대를 상처 입힐지라도.
사랑이 그대에게 말할 때
그 말을 신뢰하라.
비록 북풍이 정원을 폐허로 만들 듯
사랑의 목소리가 그대의 꿈을
뒤흔들어 놓을지라도.’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에서
사랑이다.
사랑이 수많은 사람들을
생명의 샘이 숨어있는 곳,
그 힘들고 가파른 길로 불러서
길을 내었던 것이다!
천사는 연인들을 주시하고 있다.
그에게서 느긋한 관조가 아니라
긴장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어쩌면 연인들은 생명의 샘 바로 앞에서
격렬하게 싸운 뒤,
왔던 길을 되돌아갈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불안하다.
생명의 샘이 코앞인데
혹시나 저들이
그것을 놓치지는 않을까 조바심이 난다.
성경에는 무사히
생명의 샘에 도착한 사람이 나온다.
그의 이름은 에녹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5:24)
그림 속에서 나는 에녹을 본다.
그와 하나님의 친밀한 동행을 본다.
그리고 그와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어서
그를 곧바로 생명 샘가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본다.
그래서 사랑이 한참 모자란 나는
조금이나마 안심을 한다!
제법 안정적으로
그림 활동을 하던 세간티니는
눈을 녹여 마신 것이 맹장염이 되어
결국 산에서 이슬처럼 사라졌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사랑을 나눈 곳,
자신에게 화가로서의 새 삶을 허락해 준
알프스에서 말이다.
사랑과 생명이 있는 알프스에서
사랑하고, 사랑받다 훌쩍 떠나버린
세간티니의 그림 속을 지치도록 헤매면서
나는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
오직 사랑 때문에
수많은 선배들이 이미 걸어갔던 그 길은
분명 힘들고 가파른 길이지만
그 길 끝에는 영생의 샘이 있다는 것과
그림 속 연인들처럼
하나님과 친밀히 사랑할 때
그 길을 기쁘게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3-14)
키리에 엘레이손!
#May. 9. 2013.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