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창고지기들 2013. 4. 12. 02:00

 

 

 

 

 

마차가 극장 앞에 멈췄을 때

그(바질)는 몇 년쯤 더 나이 먹은듯한

기분이 들었다.’

p. 137

 


나이는 한 살씩

꼭꼭 씹어 먹는 것이 아니다.

한 번에 대여섯 살씩

꿀꺽 삼키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마흔 살이 되었다.

젊음이 말라버린 가뭄 같은 얼굴이

어느 틈엔가 거울 속에 이사 왔다.

나는 거울 속 얼굴에

심술과 텃새를 부렸다.

 

그러다 도리언 그레이를 만났다.

부럽게도 그는

젊음과 미모의 화수분을 가지고 있었다.

 

 

“당신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멋진 젊음을 지녔고,

젊음이란 계속 간직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거든요..

언젠가 당신도 늙어서 주름지고 추해지면,

생각하느라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기고 생기를 잃을 때,

열정이 당신의 입술을 뜨거운 불길로 낙인찍을 때,

비로소 느끼게 될 거예요.

그때가 되어서야 젊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겠죠.

지금이야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당신에게 열광할 테지만

그게 언제까지 지속될 것 같은가요?...

아름다움도 천재성의 한 형태예요.

아니, 설명할 필요도 없으니

천재성을 능가한고 봐야겠죠.”

-헨리 경의 말 p. 41

 

 

지속적인 젊음과 미모는

애초에 초상화의 몫이었다.

그런데 초상화의 몫이

돌연히 도리언에게 떨어졌다.

이 와중에 초상화는

도리언의 몫인 늙음과 추함을 챙겼다.

 

헨리 경이 젊음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도리언에게 주입한다.

도리언이 헨리 경의 욕망을 성큼 입자

젊의 저주(?!)가 내린다.

젊의 저주란 영향 받는 자로만 사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자기의 영혼을 주는 것과 비슷하단 말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영향을 받은 사람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게 되고,

자신의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것도 못한다는 겁니다...”

-헨리 경의 말, p. 34

 

 

나이를 먹지 않는 YB 도리언은

한 번도 자기 자신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헨리의 아바타였다.

그래서 헨리의 생각대로 살고,

헨리의 열정대로 타올랐다.

 

젊음이란 그런 것이다.

순수하게 싱그럽고,

유연하게 아름답지만

타인의 생각과 욕망을

오롯이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기 쉽다.

그래서 젊음은 영향을 주는 자의

생각과 열정대로 자기를 탕진하곤 한다.

 

“그를 파멸시킨 것은 그의 미모,

그가 그토록 원했던 미모와 젊음이었다.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그의 인생도 깨끗했을지 모른다.

그의 미모는 가면이고 그의 젊음은 가짜였다.

청춘 따위가 다 뭐란 말인가!

설익고 미숙한 시간, 천박한 기분과 유약한 사고에

지배받는 시기에 불과한 것을,

왜 그는 그런 청춘의 옷을 입고자 했을까?

결국 젊음이 그를 망치고 말았다.”

p. 352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도리언은 자기를 인식한다.

그는 젊음과 미모에 묶인

마리오네트(줄 인형)였다.

 

그가 돌연히 줄을 끊었다.

줄이 끊긴 인형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도리언 그레이의 창조자는 오스카 와일드다.

그는 유미주의자로 유명하다.

즉, 주류 계층의 도덕과 교육을 위해

종노릇 하던 예술을 해방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계산 착오다.

왜냐하면 예술은

특정한 대상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타고난 종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부르짖었던 유미주의자들이 한 일이란

결국, 예술에게 다른 상전을 만들어 준 것뿐이었다.

자신에게 종노릇하는 예술에서

일그러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 냄새가 난다.

 

 


마흔 줄에 접어들자

나는 오롯해지고 있다.

생각과 열정에 있어서

나의 것과 주입된 것을 구별하는 중이다.

예술로 그 분만을 섬기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중이다.

 

 

가뭄 같은 얼굴이

거울 속에 이사 왔다.

다음에 만나면 친하게 지내자고

손이라도 먼저 내밀어야겠다.

 

 

잘 가라! 청춘아~

 

 

#Apr. 11. 2013.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