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아의 축복
만일 야곱의 아내 레아에게
2NE1의 노래 ‘어글리(Ugly)'를 들려준다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밝게 웃어보지만
내 맘에 들지 않아
난 예쁘지 않아 아름답지 않아~
...
I think I'm ugly
And nobody wants to love me
Just like her I wanna be pretty
I wanna be pretty
Don't lie to my face tellin' me
I'm pretty
...
All alone I'm all alone
I'm always all alone
따뜻함이란 없어
곁엔 그 누구도 날 안아줄 사람 없어..”
모르긴 몰라도
창세기 29장의 레아라면
이 노래를 들으면서
폭풍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렇게 너무 많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그녀를 만난다면
나는 따뜻하게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다.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웠지만,
라헬은 몸매도 아름답고 용모도 예뻐서
야곱은 라헬을 더 좋아하였다.’
(창세기 29:17,18a/공동번역)
“예쁜 것만 좋아하는 이 더~러운 세상!”은
비단 오늘날만의 풍조는 아니다.
눈에 보이는 미를 숭배하는 시각주의는
그 옛날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하는데도
큰 몫을 해냈기 때문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창세기 3:6)
아름다웠던 어머니 리브가를
어려서부터 보고 자라서였을까?
야곱은 얼굴과 몸매가
모두 예쁜 라헬에게 열광했다.
7년 노예(?!) 계약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 와중에 눈매가 예쁜 것도 아니고,
그저 부드럽기만 했던 레아는
일찌감치 찬밥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레아는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야곱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부드러운 눈으로
언젠가는 사랑해주겠지 하면서
야곱을 애타게 바라보길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눈매가 부드러우신(!) 하나님께서(삼상16:7)는
그런 레아의 형편을 살피셨다.
‘When the LORD saw that Leah was hated,
he opened her womb,
but Rachel was barren.'
(창세기 29:31/ESV)
하나님의 비호 아래
레아는 연거푸 네 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손수 짓는다.
르우벤(보라 아들이라)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해주겠지?’
시므온(들으심)
‘여호와께서 내가 여전히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구나!’
레위(연합함)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겠지?’
유다(찬송함)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레아의 아들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르우벤아~ 시므온아~”
한 명, 한 명 자식이 늘어가도
남편 야곱의 사랑은
예쁜 라헬에게만 꽁꽁 묶여있다.
“레위야~”
그러나 레아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소망을 담아 자식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남편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유다야~”
이름값을 못하는 아들들을
고통스럽게 부르면서
레아는 하나님과 친밀해져 간다.
그리고 마침내 레아는
고통 중에서도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 레아의 고통을
고통의 절정인 산통으로
끝까지 밀어붙이셨다.
그래서 레아는 고통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들
즉, 축복들을 낳고, 낳고, 또 낳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고통을 축복으로 변화시킨
레아의 자궁은 얼마나 축복 된가!
내게도 반짝이던 라헬의 시절이 있었다.
예쁜 나이, 예쁜 성적, 예쁜 실력,
예쁜 재능, 예쁜 성취 등으로
야곱들은 나를 사랑해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가난한 유학생의 아내이자
파트타임 목회자의 사모가 되어버렸을 때,
내 뒤엔 레아의 그림자가
문득 드리워져 있었다.
예쁘지 않은 나이, 예쁘지 않은 재능,
예쁘지 않은 가난, 예쁘지 않은 신분(F2) 등으로
야곱들은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막 레아로 태어났던
나의 눈매는 부드럽지 조차 못했다.
아무리 갈망해도
사랑해주지 않는 타인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애통해하며 우는 것뿐이다.
그것도 무정한 타인이 아니라
예쁘게 만들어 주지 않으신 분,
그러나 누가 뭐래도
예쁘게 봐주시는 분을 향해서 말이다.
그렇게 그 분은 그 옛날 레아처럼
나의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나의 태를 여셨다.
그래서 나는 고통 속에서
수많은 자녀들(글들)을 낳았고,
그들에게 이름 붙이면서
그 길고도 아팠던 시간을 통과했다.
지금도 나는 가끔씩
그 때 낳았던 글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에미의 목소리를 듣고
득달같이 달려 나온 녀석들을
하나, 하나 읽어가다 보면
내 눈엔 어느새 초승달이 뜬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4)
산통이 없이는 자식을 낳을 수 없듯이
고통이 없이는 글을 낳을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그 때의 고통에 감사하며,
간절히 소원해 본다.
레아처럼 더욱 눈이 부드러워져
무정한 야곱들을 계속해서 사랑하기를,
레아처럼 자궁이 튼튼해서
언약의 상속자를 낳고, 낳고, 또 낳기를,
그렇게 레아의 축복이 넘치도록 임하기를!
키리에 엘레이손!
#Mar. 9. 2013.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