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우적, 우적, 우적.”
“하진아~
사탕은 그렇게 씹어 먹는 거 아니야.
사탕은 입 안에 넣고 천천히 빨아 먹는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말에는 푸석한 정보만 있을 뿐,
쫀득한 확신은 거의 없었다.
내게도 사탕은 끝까지 빨아 먹기
어려운 것이었으니 말이다.
제법 뚱뚱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은 날씬하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그 때 나는 극심한 영적(!!) 스트레스로
사탕을 입에 달고 살았다.
요즘이야 씹어 먹는 사탕인
츄잉 캔디가 따로 있지만,
그 때는 그런 게 없었다.
하지만 내 수중에 들어온 모든 사탕은
순식간에 츄잉 캔디로 변신하여
아작아작 씹혀서는
곧 바로 창자 속으로 직행하곤 했다.
그 때 창자 속으로 들어간 캔디는
자신의 열량을 내 몸속에 차곡차곡 입금했다.
그렇게 들적지근한 단내가
입천장에 무겁게 매달릴 때마다,
내 몸은 조금씩 뚱뚱함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천장에 물고 있을지라도
그의 음식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욥기 20:12-14)
욥의 친구 소발이
악사탕을 소개하고 있다.
악사탕은 츄잉 캔디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 특히 악한 사람은
악사탕을 입천장에 물고는
혀 밑에서 오래도록 아껴서 빨아먹는다.
왜냐하면 그는 악사탕의 달콤함을
오래도록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창자 속으로 들어간 악사탕은
끔찍하게 쓴 독으로 변해버린다.
그 독은 창자의 주인이
악을 행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악사탕은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
원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원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상해있거나 연약해져 있다면,
악사탕은 냉큼 입속으로 들어와
특유의 달콤함으로 자신에게
오래도록 집중하도록 유혹한다.
그리고 시간을 타고
기어이 창자 속으로 스며들면,
그것은 분노, 미움, 시기,
질투, 복수 등의 독으로 변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저지르게 하고야 만다.
그렇다면 이러한 악사탕의 폐해를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까?
방법은 간단하다.
악사탕이 입속에 들어왔을 때,
혹은 비록 창자 속으로 스며들긴 했으나
그것이 악을 저지르게 하기 전에,
곧 그것을 내뱉어 버리거나
장세척을 하면 된다.
악사탕을 내뱉는 것과
장세척을 하는 모든 과정은
십자가 아래서의 개인적인 참회와
말씀 공동체 안에서 지체들과 함께
기도와 은밀한 나눔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말씀 묵상 모임에서 만난 한 분이 있었다.
그 분은 남편과 떨어진 채
오랫동안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시어머니와의 관계, 특별히 시어머니의 말이
지속적으로 주었던 상처 때문에
그 분은 결국 악사탕을 입에 물게 되었고,
악사탕의 독소로 점점 더 약해지고 있었다.
자비하신 주님의 인도로
그 분은 말씀 묵상 모임에 나오게 되었고,
어떤 말씀을 만나든
그것을 시어머니와의 관계로 끌어들이는
남다른 재주(?!)로 꼬박 6개월 동안
그 분은 똑같은 악사탕을 모임 안에서
뱉어내고, 또 뱉어냈다.
6개월 동안
그 분의 끝도 없이 반복되는
악사탕의 파편들을
받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모임에 참여했던 지체들은
선하신 주님의 은혜로
거룩한 쓰레기통이 되어
결국, 그 악사탕의 파편들을
모두 받아내었다.
그 후 그 분은 변했다.
늘 움츠러들어 끌려 다니던 사람이
모든 악사탕들을 뱉어낸 후에는
받은 소명을 따라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용사(!!)로 변했던 것이다.
할렐루야!
내 아버지에게는 주사가 있었다.
술만 마시면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하는 주사였다.
가끔씩 아버지가 주사를 늘어놓으시면
어머니는 듣기 좋은 소리도 한 두 번이지,
맨 날 똑같은 얘기만 한다고
아버지에게 핀잔을 주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악사탕의 독소를 조금이라도
내뱉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렇게 만날 때마다 자신의 상처를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다.
그들도 악사탕을 내뱉고 싶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랬다.
극심한 영적 스트레스로 사탕을 물고 다녔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나는 반복적으로
지체들에게 나누곤 했었다.
그래서 감사한 생각이 든다.
내가 뱉은 악사탕을 함께 받아주고,
마음 아파해주고, 위해서 기도해 주었던
지체들 덕분에 지금 내가 여기서 이렇게
생명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오랫동안 침묵을 하던 욥이
칠 일을 기다려준 친구들에게
비로소 입을 열었을 때,
그는 도무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자신의 고통을 탄식하고 또 탄식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등지지 않기 위해서
그는 악사탕을 필사적으로
뱉어내고 또 뱉어냈던 것이다.
그런 욥에게 필요했던 것은
뱉어낸 악사탕을
토 달지 않고 받아줄 친구였을 것이다.
그런 욥에게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은
그 옛날 누군가가 내뱉었던 악사탕을
그대로 받아주지 못했던,
받아주고 싶지 않았던
나의 모자람과 모질음 때문일 것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Dec. 8. 2012.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