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고통에 이름 붙이기

창고지기들 2012. 10. 25. 19:22

 

 

 

유진 피터슨의 책

‘비유로 말하라’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 때 그는 무릎에 생긴 병으로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녀야했다.

그런데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다녔던 병원에서

오히려 병원균에 감염되어 흉측한 종기를 얻어서

매우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그 때 그는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병을 가리켜

‘의원 병(iatrogenic disease)’이라고

명명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의원 병’이라는 세련된(?!) 이름 아래서

종기가 주는 고통을 참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유진 피터슨 본인이 만들어낸 신조어인

‘경건 병(Eusebiogenics;

의와 연관된 장소 즉, 교회나 성경 공부나

기도 모임에서 가장 자주 짓는 죄, 자기 의)’이라는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든

자기 고백적 예화다.

 

허나, 욥기를 묵상하는 동안

문득 생각난 그의 이야기를

조금 다른 맥락으로 사용한다면

그가 많이 언짢아할까?^^;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기 10:1-2)

 

 

욥은 고통의 정점에 앉아있다.

그런데 고통의 정점에서

욥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이유와 원인 혹은, 고통의 목적을

도무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욥의 영혼은 살기에 곤비하고

마음은 괴로울 대로 괴로워

입으로 불평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진 피터슨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종기에

‘의원 병’이라고 이름을 붙인 후에야

비로소 고통을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었다.

‘의원 병’이라는 이름은 종기가 발생한 원인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병원 치료 과정에서

생긴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통의 원인과 이유,

혹은 그 고통의 목적을 알게 될 때,

야생마처럼 길길이 뛰는 고통도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혹은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으로

길들여지는 법이다.

 

욥은 자기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자기 고통의 원인과 이유,

자기 고통의 목적을 알려달라고 간구했다.

자기 고통에 이름을 붙여달라고 토로했다.

심연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 속 라합 같은 자기 고통을

길들여서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렸다.

지금까지의 나처럼 말이다.

 

 

 

‘선교사 신병 훈련 기간’

‘선교사 오리엔테이션 기간’

‘선교사 개론 시간’

‘매 맞는 사역 기간’

‘페인트 마르는 거 지켜보는 기간’

‘포도밭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날들’

‘구름 속의 날들’...

 

 

그 동안 선교지에서 내가 해 온 일이란

위와 같이 그 분 앞에서

나의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었다.

어떻게 든 이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떻게 든 이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

나는 그 분 앞에서 치열하게

나의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또 붙여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포효하는 사자처럼

끊임없이 달려드는 고통들은

그 분의 말씀 안에서 이름이 붙여지고 나면

곧 만만하기 그지없는

애완동물로 둔갑을 하곤 했다.

 

그렇게 수 없는 고통에

수 없는 이름을 붙이는 동안

어느새 오리엔테이션 기간,

신병 훈련 기간이 일단락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자대 배치를 받은 후,

대적해야할 고통의 병력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허나, 말씀이신 그 분이

임마누엘이시니

그리 염려하지 않는다.

나는 계속해서 그 분의 말씀 안에서

그 분의 지혜를 따라

나의 고통에 이름을 붙일 것이고,

명찰을 단 고통을 견뎌낼 것이기 때문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Oct. 25. 2012.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