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 감자탕
감자탕을 좋아한다.
얼큰한 국물도 국물이지만,
돼지 등뼈에 붙은 살코기를 발라먹는 재미가
여간 야무진 게 아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니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도
그것을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돼지 등뼈가 들어있다는 이유로
그것을 부정하게 여기기는 하겠지만,
살코기만 쪽쪽 빨아먹는 일에
그들은 분명히 매혹을 당할 것이다.
어쩌면 대충 발라먹는 나를 보면서
먹을 줄 모른다고 핀잔을 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마태복음 12:38-39)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예수께 표적을 구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표적이 아니라 야단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하다고 꾸짖으셨던 것이다.
‘단지 표적을 좀 구했을 뿐인데,
너무 한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틀림이 없었다.
그들은 분명히 악했고, 특별히 음란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니라
그분이 행하시는 표적에만 집착했기 때문이다.
여성을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성적 대상으로 축소하여
자기 욕구를 채우는 남자를 가리켜 음란하다고 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성을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신분상승이나
경제적 만족을 위한 도구로 축소시킬 때, 그 여자는 음란하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은 음란했다.
예수님을 인격적 존재로 대하지 않고,
표적을 행하는 능력으로 축소시켜
자기들의 안목의 정욕을 채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음란한 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매섭게 말씀하셨다.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태복음 12:41,42)
예수께서는 자신이 ‘표적을 행하는 능력’으로
축소되길 원치 않으셨다.
도리어 그들이 자신을 알고 받아들여,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엄청난 비밀을 폭로하셨다.
요나보다 더 큰 이,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바로 자신이라고 누설하셨다.
그렇게라도 그들에게 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하셨던 것이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태복음 12:43-45)
표적 또한 그분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분에게 관심을 갖고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분에게 관심을 기울이다보면
마음을 점령하고 있던 더러운 귀신은 떠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주의 영이 계신 곳에서는
잠시도 배겨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은 청소되고 수리가 되어 간다.
그분을 주인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계속해서 그분이 행하시는 표적과 베풀어주시는 선물,
편안함, 안정감에만 몰두하고 집착한다면,
그분은 결코 마음에 들어오실 수도, 주인이 되실 수도 없다.
사랑이자 인격이신 탓에 그분은 온전히 허락하지 않는 마음에
무례히 침입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 때 수지맞는 것은 이전에 나갔던 더러운 귀신이다.
마음이 빈 것을 안 그것이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면,
마음은 이전보다 더 심각한 상태로 전락할 것이다.
무례하기 짝이 없기에
그들은 제멋대로 마음을 차지하고 주인 행세를 할 것이다.
감자탕의 등뼈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뭔가 뜯어먹고 빨아먹기 위해 다가오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의 안중에 나의 인격이나 마음 따위는 없다.
나는 다만 그들이 원하는 살코기,
곧 물질이나 얻어낼 것이 있는 대상일 뿐이다.
등뼈 취급을 당하는 것이 유쾌할 리 없다.
분노가 새까맣게 타오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쉽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 역시 누군가를 감자탕 뼈로 대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보냄 받은 곳에서 보냄 받은 자는 늘 갈등한다.
뼈다귀로 전락하고, 전락시키는 비참한 현실 안에서
무참히 흔들린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소망이 모두 끊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애써 소망의 끈을 붙잡는다.
성령이 창조해주시는 지혜와 순결을 갈망한다.
키리에 엘레이손!
#Feb. 8. 2016.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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